성곽길을 따라 오르는 가파른 언덕길. 이제 막 걸었을 뿐인데, 숨이 턱턱 막히는 습한 공기에 웃옷이벌써 땀에 흥건히 젖습니다.아내는 사진 배경으로 흥인지문이 잘 나오는 지점을 찾으려고 뒤를 힐끔힐끔 자꾸 돌아봅니다.길 중턱에 고른 공간에는 연인인지 부부인지 분간이 안 가는인도인 커플이 벤치에앉아 오붓한 시간을 보내고 있네요.
사진술을 배우겠다며 DSLR 카메라를 목에 걸고 멘토와 함께 이곳 낙산공원으로 출사 나왔던 십여 년 전 기억을 잠시 끄집어내 봅니다.그리곤성곽에 뚫린네모난 틈새를 액자 삼아 창신동 언덕 마을을 화각에 집어넣습니다.그런데 저희 뒤를 밟아 올라오던, 금발을 양쪽으로 땋아 내린 서양 여자가방금 제가 하던 대로 휴대전화를 언덕배기 마을로 들이대더라고요. 행동은 전염됩니다.
주산(主山)의 두 팔에 포근하게 안긴 서울 풍경을 감상하기에 좋은 장소를 찾다가, 목이라도잠깐 축인 후혜화동으로 내려가서저녁으로 떡볶이나 먹자며 아내가 점찍어 둔 카페에 들어가 음료를 주문했지요. 테라스에 앉은 여인네들이 제멋대로 말려 올라가는 치맛자락을 부둥켜 잡아야 할 정도로 세찬 바람이 불어댔지만, 공기가 그다지 시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에어컨 바람을 좀 쐬어야겠다 싶어서 투명유리로 막힌 실내 공간에 자리를 잡았지요.
저희 바로 옆자리에는 한 여성이 홀로 앉아 있었습니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얼마 후 아내가 머리에 쓴 것과 비슷한 검은색 히잡을 착용한 흑인 여성이 계단을 올라오더니 환하게 밝은 표정으로 그 여성에게 인사를 건넵니다. 그리고 두 사람은 프랑스어로 열띤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합니다.
귓전을 파고드는 두 사람의 프랑스어 대화를 안 들으려야 안 들을 수 없게 되더라고요.둘이 영어로 이야기했다면 제 귀를 막을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읽고 있는 이코노미스트(The Economist) 기사에도 집중이 안 되고...결국저는 찻잔에 입술을 대며 멍하니 유리 벽 너머 북악산만 바라보다가, 본의 아니게 두 사람의 대화를 처음부터끝까지 엿듣고 말았답니다.그리하여 제 옆에 앉은 바로그 한국 여성의 나이까지 알아버리게 되었습니다(쉿! 비밀은 지키겠습니다). 그녀의 말동무가 되어 준흑인 여성은 프랑스어를 쓰는 아프리카 국가인 세네갈 출신이더군요.
문뜩 프랑스어를 열심히 익히던 시절이떠오릅니다. 15년 전, 저는 학부 전공인 아랍어를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배우겠다며 마음을 다잡고 시리아 다마스쿠스로 어학연수를 떠났습니다만 그곳에서 프랑스에서 온 친구들을 사귀었고, 주야장천(晝夜長川) 프랑스어로만 떠들다가 끝내 프랑스어만 배워왔답니다.
로마인들이 세운 성벽의 잔해가 영롱한 조명(照明)을 받아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구도시에서 아랍 역사, 문화, 음악 등 다양한 분야를 연구하는 프랑스 친구들과 아랍식 물담배 시샤 연기가 자욱한 부티크 카페에 앉아 밤새도록 커피잔을 기울이며 - 무슬림이 아닌 친구들은 맥주를 마시기도 하며 - 수다를 떨었지요. 그 자리에는 프랑스어를 모국어 수준으로 구사하는 시리아 사람들도 끼어들곤 했습니다. 시리아를 수십 년 동안 철권통치 하는 아사드 정권을 거론하지만 않는다면 '이슬람과 세속주의'와 같이 무슬림 국가에서는 민감할 법한 주제도 안줏거리가 되었습니다. 제게는 프랑스 현지 어학연수가 전혀 부럽지 않은 소중한 경험이었던 겁니다.
아랍학(Arab studies)이라는 관심사를 공유하는 사람들끼리 모여 프랑스어로 재잘재잘 떠들어댈 기회가 흔치 않거든요. 빠리로 어학연수를 떠난다 한들 어학당에만 갇혀 지낸다면 그런 재미나고도 지적인 이야기를 프랑스어로 쏟아낼 기회는 없겠지요. 그리고 그게 제 프랑스어 실력의 밑천이 되었지요. 그 덕분에 별다른 준비 없이도 프랑스어 능력검정시험인 델프(DELF) B2에 손쉽게 합격할 수 있었습니다.
결혼 후, 아내의 나라에서 쭉 지내다 보니 서서히 프랑스어를 잊게 되었습니다. 프랑스어를 전혀 쓸 일이 없는 나라거든요. 사실 프랑스어는 중동 및 아프리카 지역에서나 위상을 자랑하지, 아시아로 넘어오면 맥 못 춥니다. 과거 프랑스 식민지였던 인도차이나반도(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에서조차 세계 공용어라는 영어가 프랑스어를 일찌감치 밀어내지 않았습니까? 하물며 인도네시아에서 프랑스어라뇨.
그렇지만 르 몽드(Le Monde)를 계속 온라인 구독하여 읽고, 유튜브로 아르떼(arte) 같은 프랑스어 방송을 꾸준히 들어서인지, 입에 거미줄이 쳐졌어도 프랑스어를 완전히 까먹는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생면부지 두 여인이 번개모임을 갖고 프랑스어로 하는 대화를 옆에서 잠자코 듣고 있자니, 불현듯 프랑스어를 활용할 묘안(妙案)이 떠올랐습니다. 나중에 좀 여유가 생기면 프랑스어로 관광통역안내사 자격증을 따두면 어떨까요? 물론 인공지능(AI) 통역기까지 세상에 나오면서 쓰임새를 빠르게 잃어가는 자격증이라지만, 본업을 다한 노년에 소일거리를 하면서 이런저런 외국인들과 만나 교류하며 젊게 늙어갈 방편이 되지 않을련지요. 지금이야 AI 통역기가 언어장벽을 걷어내 주는 참 편리한 도구라는 찬사를 받아도, 인간은 본디 정서적 교감을 필요로 하는 사회적 동물이라 곁에서 말동무가 되어줄 현지인 친구 같은 여행 안내원의 수요는 완전히 사라지지 않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