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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흘러도 들춰보는 좋은 러시아어 교재

러시아로 가는 길

by 이준영

이십 년이 지난 지금도 저는 꿈을 꿉니다. 아침 점호가 끝나자마자 PX로 내려가는 제 모습을 봅니다. 알수의 노래를 듣고 군대에서 호기심으로 러시아어 공부를 시작했더니, 인생의 분기점에서 저도 모르는 사이에 그만 선로전환기가 작동해 버렸습니다. 기관차는 엉뚱한 방향으로 질주하고 있었습니다.


3월 22일에 전역을 했으니, 마음만 먹는다면 충분히 다니던 학교에 복학할 수 있었습니다. 제가 근무했던 부대가 해안경계부대였던 덕분에 계급별 정기휴가에 닷새를 덤으로 받았습니다. 당시 병장 휴가가 14박 15일이었으니 말년 휴가를 19박 20일로 받았습니다. 충분히 복학할 수 있었지요. 하지만 저는 제대하고 나서도 러시아어를 더 배우고 싶었고, 기어코 러시아에 가보기로 했습니다.


아랍어 전공자였던 저는 그해 7월에 사우디아라비아로 떠나기로 되어있었습니다. 메디나 이슬람대학교에서 3년짜리 아랍어 연수를 무사히 마치면 학부 과정으로 올라갈 기회가 있었거든요. 그렇게 된다면 명지대학교를 졸업하지 않고, 아랍어 원어민 국가 사우디아라비아에서 학업을 마치는 편이 더 나을 수도 있었겠지요. 사실 제가 한국이슬람중앙회 선교국장님의 추천으로 초청장학생으로 선발되었고 2003년에 사우디아라비아로 떠나야 했으나, 계속 걸리적거리는 군 문제를 먼저 해결하겠다며 입학을 미뤘던 겁니다. 이제 국방의 의무에서 벗어났으니, 약속대로 거기에 가야 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말년 휴가를 나와서 '뿌쉬낀하우스'라는 유학대행업무를 겸하는 러시아어 전문학원에 등록하는 엉뚱한 짓을 저질렀습니다. 거기서 승주연 선생님을 만났고, 러시아어를 알파벳부터 다시 시작하는 기초반을 수강했습니다. PX에 앉아서 책 한 권을 다 떼긴 했지만, 그 어려운 러시아어를 혼자서 엉터리로 배웠을지 모르니, 체계적으로 처음부터 다시 하고 싶었습니다.


'다로가 브라씨유(Дорога в Россию)'라는 안에 우리말 설명 하나 없이 키릴 문자만 적힌 러시아 책으로 배우게 되었습니다. 우리말로는 '러시아로 가는 길'이라는 뜻이더군요. 사우디아라비아 초청장을 버리고 몇 달 후 아에로플로트 항공사의 일류신 기에 몸을 싣고 모스크바에 가서 러시아어를 함께 배우게 될 동무들을 승주연 선생님 반에서 만나게 되었으니, 책 제목 하나 정말 기똥차네요. 지금은 뿌쉬낀하우스 출판센터에서 '러시아로 가는 길'이라는 우리말 제목으로 그 교재를 내고 있는데, 안에 우리말 설명 하나도 없는 건 마찬가지입니다. 독학용 교재는 아니지요. 《러시아로 가는 길》은 총 네 단계로 구성되는데, 저는 승주연 선생님과 1권을 떼고, 모스크바국립대학교의 러시아어 연수센터(ЦМО)에서도 2권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현지 어학당에서 쓰는 만큼 좋은 교재인 건 분명합니다.



하지만 제가 러시아어를 되새김질할 때 지금도 들춰보는 교재는 모스크바에 도착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서점에서 구입했던 '초급자를 위한 러시아어'(Русский язык для начинающих)입니다. 영어권 학습자를 겨냥한 러시아어 교재인데, 러시아어 학습 초기에 가장 중요한 억양과 강세에 대한 설명도 충실하고, 《러시아로 가는 길》 3단계까지 가야 배울 수 있는 모든 문법 사항을 담고 있습니다. 유럽연합 언어기준으로는 A1~B1/B2 사이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제가 러시아어를 처음 배울 때 교재 선택의 폭이 넓지 않았는데, 요즘 서점에 가보면 너무 다양해서 뭐가 좋은 교재인지 따져봐야 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질 좋은 종이에 알록달록 컬러 인쇄와 재미있는 러시아 이야기로 끌어당겨는 교재들이 무겁기도 하거니와 초급부터 중급까지 다 구입하려면 비싸기까지 하지요. 저는 20년 묵은 이 책이 여전히 제일 좋더라고요.



그리고 지금은 아주 예스러운 교재가 되었지만, 《표준 러시아어》도 잊어버린 러시아어를 되새기는 데 큰 도움이 됩니다. 중고급 러시아어 문법이 이 책 한 권에 다 녹아있어서 시중에서 교재를 단계별로 여러 권 살 필요가 없거든요. 특히, 모음약화가 발생하여 발음이 어려운 러시아어의 발음기호를 달아주니까 학습 초반에 많은 도움을 받습니다. 저는 러시아어 말소리를 한글로 옮겨적어 놓은 학습서를 되도록 피하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처음에는 배울 때 편해도 독이 되어 돌아오더라고요. 《표준 러시아어》는 러시아 현지에서 정평이 난 교재를 저자가 고쳐서 편찬한 학습서라고 하는데, 시간이 지나도 빛을 잃지 않는 교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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