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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준영 Sep 19. 2024

통신보안, 여기는 모스크바

나비효과

"이준영 병장님, 기어이 러시아에 셨습니까?"


모스크바에서 휴대전화를 개통하자마자 집에 신고 전화부터 한 방 날렸습니다. 아들이 외국에 처음 나가는 거라 어머니께서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었거든요. 위험한 데는 돌아다니지 말라는 엄마표 잔소리를 건성으로 듣고 나서 전화를 끊고는 군 생활할 때 쓰던 수첩을 꺼내 기동중대 행정반으로 직통 전화를 걸었습니다.


8월 군번인 부원이도 유격훈련을 두 번 뛰고 나서, 이제 제대를 두 달 남겨 놓은 말년이었습니다. 제가 물어야 할 전화비 걱정만 아니라면, 모처럼 길게 통화해도 문제될 게 없었습니다. 부원이가 고참들 눈치 볼 일은 이제 없었지요. 리고 예정대로라면 군복을 벗자마자 모스크바로 돌아와야겠지요.


그런데 저는 모스크바에서 곧 다시 보게 될 줄 알았던 부원이 얼굴을 3년이 더 지나고 나서야 경기도 안성의 내리에서 야구방망이를 들고 멍한 표정을 짓고 마주하게 됩니다. 


'네가 왜 거기서 나니?'


그간 사정은 잘 모르겠으나 부원이는 중앙대학교 사진학과에 입학해서 다니고 있더군요.


부원이도 제가 왜 거기서 야구방망이를 휘두르고 있는지 도무지 알 재간이 없었을 겁니다.


모스크바국립대학교 러시아어 연수센터의 학생증




처음 나가보는 외국이라 모든 게 마냥 신기했고, 유럽 땅을 밟았다는 사실에 신바람이 났습니다. 원래는 군 복무를 마치고 나면 사우디아라비아 메디나이슬람 대학교의 아랍어 연수 과정에 입학해서, 아프리카 국가에서 온 아이들과 이층 침대에서 함께 먹고 자고 생활하는 군대 같은 기숙사 생활을 해야만 했습니다. 기서 유일한 오락거리라곤 프로축구가 전부일 것 같은데 그마저도 가능할지 모르겠습니다. 축구를 보려면 수염을 덕지덕지 기른 사감에게 허락을 맡아서 버스를 타고 젯다(Jeddah)로 나가야할 겁니다. 겁주려고 선배들이 괜히 하는 소리인지는 모르겠지만, 학생의 여권도 사감이 관리한다는 흉흉한 소문을 잔뜩 들어놨지요.


이게 사실이라면 통제된 거기 생활이 군대랑 다를 바가 뭐가 있겠습니까? 장 달고 제대했는데, 이등병 달고 다시 군대 가는 기분이랄까요.


그래서 제가 말머리를 돌려버렸습니다. 그리고 이게 나비효과를 일으켜 제 인생도 180도 돌아버리게 되었지요. 제가 그때 사우디에 갔더라면, 베이징올림픽이 열렸던 그해, 중앙대 안성캠퍼스 후문에서 야구방망이를 들고서 부원이를 만날 일도 없었을 겁니다.





아무튼 저는 모스크바에 있습니다. 샤발롭스카야 역 근방에 있는 기숙사에서 아늑한 1인실을 배정받았지요. 기숙사에서 월세가 가장 높다는 그 방을 폭탄 돌리기 하듯 눈치 보면서 아무도 고르질 않길래, 선심 쓰는 척하면서 속으로는 쾌재를 부르며 그 방을 찍었거든요. 혼자 지내고 니다.


방에 TV도 있네요. 켜보니 러시아와 핀란드의 남자배구 경기 중계방송이 나오고 있어요. 지금은 TV에서 흘러 나오는 모든 소리가 러시아어 공부지요. 러시아가 일방적으로 이기는 경기에 제 눈꺼풀이 스스륵 감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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