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연휴를 앞두고 아내와 함께 수원 본가에 내려갔습니다. 서울로 가져갈 책이 있는지 찾아보려고 책장을 훑어보다가, 예전에 제가 델프(DELF) B2 프랑스어 시험을 준비하면서 사용했던 교재들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중 몇 권은 시리아에 가져가서 공부했던 책들이었습니다. 거기 다마스쿠스대학교 아랍어학당에서 만난 프랑스 여인 소피(Sophie)가 좋은 말벗이 되어주었지요.
이 교재들은 델프 시험의 평가 항목인 듣기, 읽기, 쓰기, 말하기를 유럽 언어 공통 기준에 맞춰 학습할 수 있도록 설계된 자료입니다. 프랑스어에 어느 정도 익숙해지면 독학으로도 충분히 학습할 수 있을 정도로 내용이 충실하게 설명되어 있습니다. 다만, 가격이 꽤 비싸서 이만큼 장만하는 데 50만 원은 들었을 겁니다. 본가가 좀 더 좁은 집으로 이사하면서 공간을 잡아먹는다는 책을 많이 버렸는데, 이 책은 추억이 깃든 물건이라 이사할 때도 버리지 않고 간직하고 있습니다.
프랑스어 인증 시험 DELF B2를 준비하면서 사용했던 교재들
중앙아시아로 나가서, 그동안 배운 러시아어를 써먹겠다는 계획을 접고, 중동으로 향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겨울 추위가 매섭다는 표현으로는 부족할 만치 혹독한 러시아가 제 체질에 맞지 않더군요. 기후에 적응하지 못해서 모스크바국제관계대학교(MGIMO) 기숙사에서 몸져눕고, 보따리를 도로 싸서 돌아오고 말았거든요. 이후로는 여행을 가더라도 몽골, 카자흐스탄처럼 겨울에 추운 나라는 거들떠보지도 않게 되었습니다. 어머니가 자꾸 같이 가보자고 해서 찾아간 강남에 용하다고 소문난 명리철학관에서도 추운 나라가 저와 맞지 않는다고 하더군요. 믿거나 말거나요. 아무튼 저는 뜨거운 태양이 내리쬐고 야자수가 늘어선 북아프리카에 강하게 끌렸습니다. 따지고 보면, 훗날 제가 열대 지방 인도네시아에서 아내를 만나고 그와 관련된 일을 하려는 것이 다 필연적인 과정이었나 봅니다.
북아프리카의 모로코, 알제리, 튀니지는 아랍 국가이지만, 과거 프랑스의 식민지였고 여전히 프랑스와 유대관계가 깊어서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모로코와 튀니지는 프랑스어권 국제기구인 프랑코포니(La Francophonie)에 속해 있습니다. 알제리인들도 프랑스어를 잘 알지만, 독립전쟁을 겪으며 프랑스에서 분리되었기 때문에 반제국주의 정서가 강하고, 아랍어가 국어임을 내세우며 아랍 국가임을 강조합니다. 반면 모로코와 튀니지는 정부 공문서가 프랑스어로 작성될 정도로 프랑스어의 영향력이 여전히 큽니다. 삼성전자 모로코 법인 구직 공고를 보면 아랍어가 아닌 프랑스어 능통자를 찾지요. 저는 모로코에 가보고 싶은 마음이 있었기에 프랑스어를 배우기로 결심하고, 알리앙스 프랑세즈에 등록했습니다. 일본어, 아랍어, 러시아어에 이어 제5외국어와 이렇게 만났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