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준영 Oct 03. 2024

러시아어 레벨 테스트 보기 전 쓸데 없는 짓

6격 변화표

탱크가 지나가는 것 같은 굉음을 내며 모스크바에서의 제 첫날 아침잠을 깨웠던 육중한 쇳덩이를 끄는 사람은 펑퍼짐한 중년의 아주머니였습니다. 우리나라 지하철에서는 여성 기관사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서, 노면전차를 여기서 아주머니가 운전하는 게 참 신기했습니다. 인민 해방을 부르짖었던 소련에서 일은 남자와 여자라는 구별이 없나 봅니다. 소련이 망한 지 10년이 넘었지만, 그 체제에서 태어나서 아직도 그 물에 흠뻑 젖어있는 사람들이잖아요.


전화기를 사려고 조그마한 가게에 갔더니, 물건을 제가 직접 집어 와서 계산대에 올려놓는 게 아니더군요. 사려는 물건이 뭔지를 진열대 점원에게 이야기한 뒤에, 점원이 끊어준 영수증을 들고 계산대에 가서 물건값을 치러 영수증에 도장을 받고, 그걸 다시 들고 진열대에 가서 보여주면 그제야 점원이 물건을 내어주더라니까요. 한 사람만 있어도 잘 돌아갈 가게에 두 사람이 근무하여 - 허리춤에 총을 찬 경비원까지 포함하면 세 사람 - 쥐꼬리만 한 월급으로 일자리를 나누는 소비에트 식 운영 방식이 고스란히 남아있었습니다.




차 안에 자리가 남아있어서 앉았습니다. 그리 멀지 않은 거리였으나 느림보 전차라서 한 20분은 가야 어학원에 도착합니다. 가끔 검표원 옷을 입은 아주머니가 들이닥쳐 '양심 검표'한 표 딱지를 보여달라고 합니다. 여기서는 운전기사가 승객들의 표를 일일이 검사하지 않습니다. 차 안에는 표에 구멍을 뚫는 펀치가 있는데, 승객은 탑승하면 알아서 양심껏 펀치에 표를 넣고 구멍을 뚫어야 합니다. 그래서 무임 승차하더라도 운만 좋으면 안 걸리는 데, 이렇게 아주머니가 불쑥 전차에 올라타기라도 하면 운임의 10배를 과태료로 내야 합니다. 건너편에 한 아저씨가 양심을 팔아먹은 대가를 치르고 있네요. 저는 한 달짜리 정기권을 끊었기에, 검표를 안 해도 됐답니다. 당당하게 정기권을 아주머니에게 슬쩍 보여주면 그만이었지요.


러시아 사람들은 거미줄 같은 전선으로 도시의 미관을 해치는 노면전차를 뜨람바이(трамвай)라고 부릅니다. 영어의 트램웨이(tramway)가 러시아로 건너가면서, 'w'자 발음을 못 하는 러시아 사람 입에서 'v(в)'로 바뀐 겁니다. 이 사람들은 제 고향 수원도 수본(Сувон)이라고 읽고, 우리나라 화폐 단위 '원'도 '본(вон)'이라고 부릅니다. 미국의 수도 워싱턴은 바신그톤(Вашингтон)이 됩니다. 이 사람들이 우리말의 '이응(o)' 발음을 못 한다는 건 이미 말씀드렸지요. 삼성은 '삼순그'가 된다고요. 그래도 한국에서 만난 교환학생 마리야는 제가 자꾸 연습을 시키니까 '수원'이라고 좀 어색하지만 제대로 발음하게 되더라고요.





차 안에는 한국 사람들이 좀 많았습니다. 오늘 어학원에서 레벨테스트 보고 반 배치받거든요. 다들 책 꺼내서 열심히 뭔갈 외우고 있습니다. 서울대학교 노어노문학과 다니다가 왔다는 자존심 센 형도 있었고, 음악을 공부하려고 여길 왔다는 누나도 있었는데, 저처럼 대책 없이 여길 온 사람은 아무도 없더라고요. 그렇지만 러시아어 실력은 다들 고만고만했지요.


서양 애들은 그냥 묵묵히 창밖만 보고 가는데, 한국 사람들을 뭘 그렇게 외우는 걸까요? 너도나도 할 것 없이 격 변화표를 꺼내 달달 외우고 있었습니다. 안에 중국인도 있었지만, 누가 한국 사람인지 단박에 알겠더라고요. 


러시아어는 단어가 문장 내에서 문법적 쓰임에 따라 꼴이 복잡하게 바뀌는 언어입니다. 이런 언어를 언어학에서는 굴절어(屈折語)라고 하는데, 우리에게 익숙한 영어도 사실 굴절어입니다. 학생(student)의 복수는 'students'로 뒤에 s가 붙고, 동사 arrive가 과거형이 되면 arrived로 뒤에 d가 붙잖아요. 이게 다 굴절 현상입니다. 그런데 러시아어는 굴절의 정도가 아주 심한 언어입니다.


가장 만만한 러시아어 단어 '학생(студент)'으로 예를 들어봅시다.


1. 주격 (Nominative):
Студент учится в университете. (학생이 대학교에서 공부합니다.)
- 주어로 사용되며, 변형 없이 기본형 그대로 사용됩니다.

2. 속격 (Genitive):
У студента нет книги. (학생에게 책이 없습니다.)
'…의' 의미를 나타내며, 소유를 표현하거나 부정문에서 사용됩니다. 주로 명사의 끝에 -а를 추가합니다.

3. 여격 (Dative):
Я дал книгу студенту. (나는 학생에게 책을 주었습니다.)
'…에게'의 의미를 나타내며, 대상이나 수혜자를 표현할 때 사용됩니다. 명사의 끝에 -у를 추가합니다.

4. 대격 (Accusative):
Я вижу студента. (나는 학생을 봅니다.)
동작의 대상이 되는 명사를 나타내며, 명사의 끝에 -а를 추가합니다.

5. 조격 (Instrumental):
Мы говорим со студентом. (우리는 학생과 이야기합니다.) '…와 함께' 또는 도구를 나타내며, 명사의 끝에 -ом을 추가합니다.

6. 전치격 (Prepositional):
Я думаю о студенте. (나는 학생에 대해 생각합니다.)
특정 전치사와 함께 사용되어 '…에 대하여'의 의미를 나타내며, 명사의 끝에 -е로 추가합니다.


이걸 러시아어의 6격 변화라고 하는데, 군에서 머리가 굳어져서 돌아온 복학생들이 강의실에 들어오면 격변화가 하나도 기억이 안 나서 수업에 따라가기 힘들다고 하지요. 그래서 서울대 다니는 형아도 방학 때 여기까지 와서 격 변화를 표로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교재 내용을 달달 외고 있나 봅니다. 저도 괜히 뭐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군대에서 보던 러시아어 교재를 꺼내 격 변화표를 외우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이를 어쩐답니까? 실제로 레벨 테스트를 치러보니까 이 따위 걸 외운 게 아무 소용이 없더라고요. 러시아 사람들이 아직도 사회주의 시스템에 젖어있다고 제가 잠깐 흉을 봤는데, 우리 한국 사람들은 시험 앞두고 이런 쓸데없는 거나 달달 외우는 습성에 젖어있었던 겁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