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어 키릴 문자에는 영어의 '에이치(h)'에 해당하는, 발음 기호 [h] 소리가 나는 자음자(子音字)가 없습니다. 그래서 러시아 사람들은 홍콩(Hong Kong)을 '곤콘그(Гонконг)'라고 우스꽝스럽게 적어놓지요. 우리말 '이응' 글자와 같이 영어의 복자음 -ng[ŋ] 음가를 표기할 방법이 없어서 러시아 사람들은 우리나라 기업 삼성을 '삼순그(Самсунг)'라고 적습니다. 당연히 제 이름도 엉망이 되지요.
저는 해외에서 이브라힘(Ibrahim)이라는 이름을 씁니다. 지금도 쓰고 있는 이 아랍어 이름은 영어로 에이브러햄(Abraham)과 뜻이 같습니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그 아브라함이 맞습니다. 제가 이슬람교에 입교할 때 이태원 중앙성원의 술레이만 이행래 이맘님이 지어주신 이름이었지요.그래서 어디서든 외국어 이름을 따로 만들 필요가 없었습니다. 터키에서도인도네시아에서도 저는 이브라힘입니다.
다만, 요즈음에는 무슬림 국가가 아닌 곳에서 외국인을 대할 때 초면에 종교색이 팍팍 드러나는 이름을 꺼내기가 부담스러워서 그냥 '준(Jun)'이라고 소개합니다. 그렇다고 존(John), 탐(Tom), 크리스(Chris)같이 영국문화원에 다닐 때 우리나라 사람들이 곧잘 만들어 쓰는영어 이름을 쓰지는 않을 겁니다.다 따지고 보면 그런 이름들도성경에 뿌리를 둔 종교색 짙은 이름인걸요.그러니 러시아에서 제가 세르게이(Сергей)나 드미트리(Дмитрий)가 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러시아 사람들이 [h] 발음을 내지 못하다 보니 제 이름을 '이브라김(Ибрагим)'이라고 적고, 그렇게 읽어버립니다. 아랍어의 하(Haa, ه) 자음자는 죄다 발음이 [g]로 변해 버리는 겁니다. 함자(Hamza)라는 모로코계 벨기에인 래퍼의 이름은 러시아에서 '감자(Гамза)'가 됩니다. 그가 강제 개명을 당한 걸 알면 기절초풍할 노릇이겠군요. 러시아에는 라술 감자토프(Расул Гамзатов)라는 캅카스 출신의 위대한 시성(詩聖)이 있지요. 그의 이름을 원래대로 발음할 수 있는 타타르(Tatar) 사람들은 로마자로 함자토프(Hamzatov)라고 적습니다. 제 이름도 원래대로 이브라힘이라고 쓰고 발음할 겁니다. 지금 열차 안에서 저랑 마주 보고 앉아 말을 걸어오는러시아아가씨처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