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차는모스크바 근교를 벗어나 드넓은 평원을 달리고 있습니다. 저 멀리 자작나무 숲이 보입니다.
Отчего так в России берёзы шумят Отчего белоствольные все понимают?
러시아의 자작나무들은 왜 그렇게 몸을 부르르 떨며 소리를 내는가 몸통이 하얀 나무들은 어찌하여 모든 걸 알고 있는가?
- 류베(Любэ)의 <자작나무> 중에서 -
러시아 사람들은 자작나무를 '비료자(берёза)'라고 부르는데, 자작나무에 자신들의 민족혼이 담겼다고 생각하여자작나무를 노래하고 시를 쓰지요.정령들이 거하고 있을 것만 같은 숲을 보고 있자니 군 복무 중에 수도 없이 들었던 류베의 자작나무 선율이 떠올랐고,손으로 턱을 괴어 뭔가 골똘히 생각에 잠깁니다. 무엇이 절 여기까지 이끌었을까요?
"쁘리볫(안녕)"
카잔까지 긴 여행길이 지루하지 않도록생면부지 러시아 여성 둘이 기꺼이말동무가 되어 줄 모양인가 봅니다.모스크바의 지하철 승강장으로 내려갈 때마다 마주하는 굳은 얼굴들과는 달리, 활짝 미소 지으면서 우리에게 먼저 인사를 건네는 아이발라(Aybala)와 라리사(Larisa)의 등장에 한겨울에 뻬치카(러시아 난로)를 켠 듯 온기가 제 마음에 가득 찹니다.
현지에서 꾸뻬(Купе)라 불리는 4인실 침대차에 네 사람이 모여 앉았습니다.이층침대의아래쪽 자리를 쓰기로 한 바쉬키르는 짐을 자기 누울 자리에 대충 던져놓습니다.
러시아 열차의 4인실 침대차 내부 모습
"니혼진데스까?(일본인이에요?)"
베이지색 원피스를 입은 푸른 눈동자 여인, 아이발라가 난데없이 일본어로 말을 걸어옵니다. 꽤 당황스러웠지요.
"이에, 와타시와니혼진쟈아리마셍. 캉코쿠진데스.(일본인 아니에요. 한국인이에요.)"
저는 엉겁결에 일본어를 그대로 받아넘기고 말았습니다.
"미안해, 일본인 같아 보여서 그만..."
아이발라가 약간 멋쩍은 듯 웃으며 다시 러시아어로 돌아갑니다.
"어느 나라에서 왔어?"
'방금 한국 사람이라고 말했는데... 얘는 일본어로 먼저 말을 붙여 놓고도 일본어가 짧아서 캉코쿠(한국)를 모르나 보군.'
저는 이 여인이 일본어를 정말 할 줄 아는지 궁금해졌습니다. 그래서 한마디를 더 던졌는데 그녀가 제 말을 알아듣지 못하네요. 알고 보니 일본어를 배우긴 하는데 진도가 느리더라고요.그녀가 가방에서 일본어 교재를 하나 꺼내더니 제게 보여주고,이 문장 저 문장을 읽어달라고 합니다.
아뿔싸.한국이 과거 일본 식민지라서 한국 사람이면 누구나 일본어를 할 줄 안다는 그릇된 생각을 이 아가씨가 품으면 안 되겠지요. 그래서 제가 고등학교 때 일본어를 혼자 익혔을 뿐이고 한국 사람 중에서 일본어 할 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고 미리 말해두고엉터리일본어 과외 선생 노릇을 했습니다.
열차가 기적소리를 내뱉으며 한 시간쯤 더 달렸을까, 차창 밖이 어둑해졌습니다. 앞으로 열 시간은 더 달려, 해가 다시 뜨면 열차가 목적지에 다다를 겁니다. 바시키르와 라리사는 둘이 금세 친해졌는지 신나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아이발라는 제가 러시아에 왜 왔는지 무슨 일로 카잔에 가는지 꽤 궁금해합니다. 제가 이 공간에서 유일한 외국인이잖아요. 저는 군대에서 우연히 알수의 노래를 듣고 그녀에게 흠뻑 빠져버렸노라고, 그래서 군대에서 혼자 러시아어를 배웠고, 제대(除隊)하고 나서도 러시아어 학원까지 다니며 러시아에 올 준비를 했노라고 고주알미주알 죄다 털어놓았습니다. 그리고 알수의 고향인 타타르스탄(Tatarstan)을 구경하고 싶어서 카잔에 간다고 말했지요.
요즘 같으면 온 세계의 한류 팬들이 드라마 속 명장면에 나오는 버스정류장에서 그저 기념사진을 찍겠다고 비행기 타고 한국에 오는 형국이니, 제 말이 그렇게 얼토당토아니한 소리는 아니었을 겁니다. 그렇지만 러시아어권 가수 알수의 고향에 가보겠다고 한국 사람이시베리아를 건너 날아오다니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을 법하지요.게다가 알수가 태어난 곳은 카잔에서도 남동쪽으로 카자흐스탄 국경을 향해 한참을 더 가야 나오는 시골도시 부굴마(Бугульма)입니다.아이발라도 그 근방 시골에서 자랐다고 합니다.
"이브라힘, 네가기적처럼알수를 만나게 되면 뭘 하고 싶어?"
'그럴 일이 없으니 딱히 생각해 놓은 게 없는데...'
그러다 문뜩 브리트니 스피어스의 사인을 팔뚝에 받고 세상 다 가진 듯 행복해하는 팬을 TV에서 본 게 떠올랐습니다.
"팔뚝에 사인해 달라고 하면 알수가 해줄까?"
"음... 그렇게 멀리서 찾아왔다는 데 해줄지도 모르지.""그거 그냥 내가 지금 당장 해줄까? 나도 알수처럼 타타르 여자인데말이야. 내 이름 아이발라는 타타르 말로 '달빛 아이(лунная дочь)'라는 뜻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