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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준영 Aug 07. 2024

카잔 가는 길, 열차에서 만난 달빛 아이

순박한 시골 아가씨 아이발라

열차는 모스크바 근교를 어나 드넓은 평원을 달리고 있습니다. 저 멀리 자작나무 숲이 보입니다. 


Отчего так в России берёзы шумят
Отчего белоствольные все понимают?

러시아의 자작나무들은 왜 그렇게 몸을 부르르 떨며 소리를 내는가
몸통이 하얀 나무들은 어찌하여 모든 걸 알고 있는가?

- 류베(Любэ)의 <자작나무> 중에서 -


러시아 사람들은 작나무를 '비료자(берёза)'라고 부르는데, 자작나무에 자신들의 민족혼이 담겼다고 생각하여 자작나무를 노래하고 시를 쓰지요. 령들이 거하고 있을 것만 같은 숲을 보고 있자니 군 복무 중에 수도 없이 들었던 류베의 자작나무 선율이 랐고, 손으로 턱을 괴어 뭔가 골똘히 생각에 잠깁니다. 무엇이 절 여기까지 이끌었을까요?



"쁘리볫(안녕)"


카잔까지 긴 여행길이 지루하지 않도록 생면부지 러시아 여성 둘이 기꺼이 동무가 되어 줄 모양인가 봅니다. 모스크바의 지하철 승강장으로 내려갈 때마다 마주하는 굳은 얼굴들과는 달리, 활짝 미소 지으면서 우리에게 먼저 인사를 네는 아이발라(Aybala)와 라리사(Larisa)의 등장에 한겨울에 치카(러시아 난로)를 켠 듯 온기가 제 마음에 가득 찹니다. 


현지에서 꾸뻬(Купе)라 불리는 4인실 침대차에 네 사람이 모여 앉았습니다. 이층침대의 아래 자리를 쓰기로 한 바쉬키르는 짐을 자기 누울 자리에 대충 던져놓습니다.


러시아 열차의 4인실 침대차 내부 모습

 

"니혼진데스까?(일본인이에요?)"


베이지색 원피스를 입은 푸른 눈동자 여인, 아이발라가 난데없이 일본어로 말을 걸어옵니다. 꽤 당황스러웠지요.


"이에, 와타시와니혼진쟈아리마셍. 캉코쿠진데스.(일본인 아니에요. 한국인이에요.)"


저는 엉겁결에 일본어를 그대로 받아넘기고 말았습니다.


"미안해, 일본인 같아 보여서 그만..."


아이발라가 약간 멋쩍은 듯 웃으며 다시 러시아어로 돌아갑니다.


"어느 나라에서 왔어?"


'방금 한국 사람이라고 말했는데... 얘는 일본어로 먼저 말을 붙여 놓고도 일본어가 짧아서 캉코쿠(한국)를 모르나 보군.'


"야 까례예츠. 이즈 유즈노이 까레이. 이스 시울라(난 한국인이야. 남한에서 왔어. 서울말이야.)"


그냥 한국이라고 하면 또 남북을 물어볼 것 같아서 남한이라고 제가 선수를 쳤지요.


"니혼고가데끼룬데스까?"


저는 이 여인이 일본어를 정말 할 줄 아는지 궁금해졌습니다. 그래서 한마디를 더 던졌는데 그녀가 제 말을 알아듣지 못하네요. 알고 보니 일본어를 배우긴 하는데 진도가 느리더라고요. 그녀가 가방에서 일본어 교재를 하나 꺼내더니 제게 보여주고, 이 문장 저 문장을 읽어달라고 합니다.


아뿔싸. 한국이 과거 일본 식민지라서 한국 사람이면 누구나 일본어를 할 줄 안다는 그릇된 생각을 이 아가씨가 품으면 안 되겠지요. 그래서 제가 고등학교 때 일본어를 혼자 익혔을 뿐이고 한국 사람 중에서 일본어 할 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고 미리 말해두고 엉터리 일본어 과외 선생 노릇을 했습니다.



 

열차가 기적소리를 내뱉으며 한 시간쯤 더 달렸을까, 차창 밖이 어둑해졌습니다. 앞으로 열 시간은 더 달려, 해가 다시 뜨면 열차가 목적지에 다다를 겁니다. 바시키르와 라리사는 둘이 금세 친해졌는지 신나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아이발라는 제가 러시아에 왜 왔는지 무슨 일로 카잔에 가는지 꽤 궁금해합니다. 제가 이 공간에서 유일한 외국인이잖아요. 저는 군대에서 우연히 알수의 노래를 듣고 그녀에게 흠뻑 빠져버렸노라고, 그래서 군대에서 혼자 러시아어를 배웠고, 제대(除隊)하고 나서도 러시아어 학원까지 다니며 러시아에 올 준비를 했노라고 고주알미주알 죄다 털어놓았습니다. 그리고 알수의 고향인 타타르스탄(Tatarstan)을 구경하고 싶어서 카잔에 간다고 말했지요.



"뭐라고?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잖아. 그리고 알수는 지금 모스크바에 있어."


요즘 같으면 온 세계의 한류 팬들이 드라마 속 명장면에 나오는 버스정류장에서 그저 기념사진을 찍겠다고 비행기 타고 한국에 오는 형국이니, 제 말이 그렇게 얼토당토아니한 소리는 아니었을 겁니다. 그렇지만 러시아어권 가수 알수의 고향에 가보겠다고 한국 사람이 시베리아건너 날아오다니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을 법하지요. 게다가 알수가 태어난 곳은 카잔에서도 남동쪽으로 카자흐스탄 국경을 향해 한참을 더 가야 나오는 시골도시 부굴마(Бугульма)입니다. 아이발라도 그 근방 시골에서 자랐다고 합니다.


"브라힘, 네가 적처럼 알수를 만나게 되면 뭘 하고 싶어?"


'그럴 일이 없으니 딱히 생각해 놓은 게 없는데...'  


그러다 문뜩 브리트니 스피어스의 인을 팔뚝에 받고 세상 다 가진 듯 행복해하는 팬을 TV에서 본 게 떠올랐습니다.


"팔뚝에 인해 달라고 하면 알수가 해줄까?"


"음... 렇게 멀리서 찾아왔다는 데 해줄지도 모르지." "그거 내가 지금 해줄까? 나도 알수처럼 타타르 여자인데 말이야. 내 이름 아이발라는 타타르 말로 '달빛 아이(лунная дочь)'라는 뜻이야."


아이발라는 제 대답을 듣기도 전에 가방에서 꽤 두툼해 보이는 검은색 펜을 하나 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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