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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차 시간표가 정해 놓은 작별의 시간

달빛 아가씨의 선물

by 이준영
Встреча была коротка:
В ночь ее поезд увез,
Но в ее жизни была песня безумная роз.

만남은 짧디 짧았지.
간밤에 기차가 그녀를 싣고 어디론가 데려가 버렸지
하지만 넋을 빼앗아 갈 듯한 장미의 노래가 그녀의 인생과 함께 했다네.

- 안드레이 보즈네센스키(Andrey Voznesensky) 작사 《백만 송이의 장미》 중에서





눈을 떠보니 차창 밖은 이미 날이 밝았습니다. 볼가강 물줄기를 따라 달리는 열차는 곧 타타르스탄공화국 경계 안으로 들어갈 모양입니다. 아직 침대 아래로 내려가기 싫습니다. 이대로 조금만 더 누워있고 싶네요. 열차에서 내리고 나면 오늘 온종일 바시키르와 두 다리로 걸어 다녀야 할 테니깐요.



Желаю лунной радости и счастья
Айбала лунная девочка
달빛 기쁨과 행복을 바랄게
달빛 아가씨 아이발라



일자로 누운 자세에서 팔을 쭉 뻗으면서 게으름이 뚝뚝 떨어지는 하품 한 번 하고 시원하게 기지개를 켭니다. 간밤에 달빛 아가씨가 알수 사인 대신에 가져가라며 유성펜으로 큼지막하게 제 팔뚝에 적어놓은 글귀가 눈에 들어옵니다. 몸을 옆으로 돌려 눕고, 글귀를 한참 동안 뚫어지게 쳐다봅니다. 눈코입이 앙증맞게 달린 달덩이 그림이 '달빛'이라는 낱말 옆에 그려져 있습니다.


러시아어의 '줴(Ж)' 글자는 지금도 볼 때마다 다리가 많이 달린 벌레 같이 생겼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달빛 아가씨가 제 팔에 그려 넣은 Ж는 긴 더듬이로 앞에 닿는 게 뭐든 간에 확 휘감아 버릴 것만 같습니다.




"도브러예 우뜨로!(좋은 아침!)"


제 팔 뒤편에도 달빛 아가씨가 필기체로 뭐라고 잔뜩 적어 놓았기에, 팔을 안으로 접고 시선을 그리로 옮기려던 참이었습니다. 저는 씩 웃으면서 달빛 아가씨에게 팔을 들어 보였습니다. 그리고 두 손으로 난간을 꽉 움켜쥐며 천천히 침대에서 내려옵니다.


"느라비짜?(그거 마음에 드니?)"


저는 고개를 끄덕입니다. 달빛 아가씨에게 고맙다는 말을, 팔을 한 번 더 들어 보이며 몸짓으로 전달했습니다. 열차는 타타르스탄공화국의 수도인 카잔 시내에 들어왔고, 서서히 속력을 줄이고 있습니다. 창밖으로는 어머니 러시아 대지를 굽이굽이 파고드는 장대한 볼가강으로 유유히 흘러드는 카잔카강이 펼쳐집니다. 이제 곧 카잔역에 멈춰 서겠죠.




이윽고 열차 시간표가 정해놓은 작별의 시간이 왔습니다. 제 러시아 현지 휴대전화 번호는 연락 수단으로 별 의미가 없습니다. 카잔 여행을 마치면, 모스크바에 돌아가 짐을 좀 정리한 뒤에 러시아 땅을 떠날 예정이었거든요.


달빛 아가씨는 잠시 머리매무새를 고치더니, 제게 적을 종이를 달라고 합니다. 저는 이미 달빛 아가씨 글씨가 그득했던 팔뚝을 장난스럽게 내밀었다가, 어학당에서 쓰는 러시아어 교재를 가방에서 꺼내어 건넸습니다. 달빛 아가씨는 첫 페이지 모서리에 이메일 주소를 적었습니다.


"До свидания!(안녕, 다시 만날 때까지!)"


짧지만 즐거웠던 만남을 뒤로하고, 우리는 이 한마디만 남기고 헤어졌습니다. 저는 바쉬키르와 함께 카잔 크렘린을 향해 몇 발걸음을 떼다가 고개를 돌립니다. 그리곤 다른 방향으로 시야에서 점점 멀어져 가는 달빛 타타르 여인, 아이발라의 뒷모습을 슬쩍 한 번 더 쳐다봅니다. 그녀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졌지만, 제 팔뚝에 남겨 놓은 달님은 여전히 빛을 비추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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