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아저씨'에게 러시아어 실력 자랑하고 싶었다

재회의 기회

by 이준영

러시아어 읽는 법이 익숙해졌고, 벼는 고개를 숙이기보다는 빳빳하게 들고 싶어졌습니다. 모스크바에서 왔다는 옛 후임병, 부원이에게 제가 러시아어를 배우기 시작했고, 키릴 문자를 읽을 수 있게 되었노라 자랑하고 싶었습니다. 제가 해안독립중대로 전출 오면서 그 후임과 연락이 끊어졌으나 다시 만날 기회가 아예 없지는 않았습니다.


해안경계부대에서는 그믐달로 달빛이 사라지는 시기를 무월광취약시기라고 부르는데, 야음(夜陰)을 틈타 북한에서 바닷길로 간첩을 보내기 딱 좋은 시기라서 경계 태세가 한 단계 더 강화됩니다. 그래서 제가 처음에 몸담았던 연대 기동중대에서 거의 1개 소대 규모 병력을 해안경계부대로 지원해 줍니다. 연대 기동중대의 파견 병력은 칼바람 부는 해식절벽 위에 덩그러니 놓인 소초(小哨)에 짐을 풀고 경계작전을 수행하는데, 거기에는 취사시설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연대 기동중대 인원들은 끼니때마다 해안독립중대 취사장으로 군대말로 '식사 추진'을 와서 밥을 받아 갑니다. 이때 상병급 중견 고참 병사가 PX로 내려와서 냉동식품을 전자레인지에 돌리고, 과자랑 음료수를 잔뜩 싸서 소초로 돌아가지요.





제가 해안중대로 전출을 가면서 부원이와는 '아저씨' 관계가 되었습니다. 우리나라 군대에는 옆에서 듣기에도 참 민망한 호칭 문화가 있습니다. 병사들끼리는 소속 중대가 다르면 전역 한 달 남은 말년 병장이든 이제 막 자대 배치받은 이등병이든 서로 아저씨로 호칭합니다. 상하 관계가 없기 때문이지요. 이십 대 청년들끼리 아저씨가 뭡니까? 마땅한 호칭이 없어서 그런 식으로 부른 것인데, 원래 육군 규정은 병(兵) 상호 간에는 '전우님'으로 호칭하게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전우님이 닭살 돋는 호칭이라 그렇게 부르는 사람은 없었지요. 요즘은 '용사님'이라고 부르라고 하던가요?


물론 상대가 간부라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제가 말년 병장 때 우리 부대로 해군 UDT/SEAL 인원이 파견 나와서 일주일 동안 먹고 자고, 화장실 가기 귀찮다며 배수로에 방뇨(放尿)를 하기도 했습니다. 우리 부대 병사들은 소령 계급장을 단 UDT 대장에게만 장교니까 경례하고 해군 하사들과는 마주쳐도 경례하지 않고 그냥 지나갔는데, 저는 하사들에게도 꼬박꼬박 경례하고 존대했습니다. 그게 규정이니깐요. 병장이 짬 좀 먹었다며 하사를 무시하는 거 딱 질색입니다.




아무튼 제겐 불과 몇 주 전까지만 해도 선임이라서 말을 높이는 관계였던 연대 기동중대 고참들에게 하루아침에 아저씨 소리를 하려니, 풀색 군복을 입고 있어서 그런지 그게 어색하고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한 달에 한 번 파견 때마다 PX를 찾는 옛날 고참들에게 계속 존댓말을 해가며 선임 대접을 해줬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연대 기동중대에서 짧으나마 한솥밥을 먹었던 저의 예전 후임병들도, PX에 들어와서는 '아저씨'인 저에게 존댓말을 하며 선임 대접을 해주더라고요. 부원이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시간이 좀 더 흘러 연대 기동중대 예전 선임들은 하나둘씩 전역했고, 제가 기동중대를 떠나오고 나서야 그리로 들어온, 저랑 일면식(一面識)도 없는 '아저씨'들이 기동중대에 더 많아지는데, 그네들은 절 모르고 저도 그네들을 모르니 그들과는 그냥 서로 아저씨 대우를 하게 됩니다.


군 생활 1년 반환점을 돌아 제가 상병이 되고 나서 얼마 후, 연대 기동중대의 화기소대가 해안으로 파견 나온다는 반가운 소식을 듣게 됐습니다. 저는 모스크바 출신 부원이와 다시 만날 생각에 너무 기뻤습니다.


아, 러시아어로 모스크바는 '마스끄바(Москва)'라고 읽습니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러시아어 키릴문자 33개 외우기는 어렵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