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X의 미닫이문이 스르르 열렸고, 기동중대의 호랑이 흉장을 단 부원이가 안으로 들어옵니다. 아직 일병 짬이라 PX로 내려올 군번은 아닌 것 같은데, 이번에 중식(中食, 점심 식사를 군대에서 이르는 말)을 받으러 온 화기소대 인원의 짬이 전체적으로 좀 비리비리한가 봅니다.
아니면 유기두 병장이 절 위해 부원이를 PX로 내려보내 줬을지도 모릅니다. 기동중대 소속이기도 한 유기두 병장은 연대 취사병 최고참입니다. 제가 기동중대에 있을 적에 취사병 생활을 잠깐 한 적이 있는데, 더운 여름 비좁은 취사병 휴게실에서 우리는 선풍기 하나에 의지하여 땀을 뻘뻘 흘리며 지냈습니다. 저는 그와 미운 정 들 새 없이 고운 정만 간직하고 취사장을 떠났습니다. 이번에 화기소대가 해안으로 파견 나오면서 유기두 병장이 우리 부대 취사장으로 파견을 나왔는데, 본부소대 운전병 내무실에서 지내게 되었답니다.
저는 동그란 뿔테 안경을 쓴 부원이 얼굴을 보고 너무 반가웠습니다. 부원이는 제가 떠난 후의 기동중대 이야기를 살짝 흘렸습니다. 새로 부임한 중대장의 괴팍한 성격 때문에 아주 힘들다고 하더군요. 사실 저도 그 괴짜 중대장과 큰 마찰이 생기는 바람에 결국 연대장 직권(職權)으로 이곳 해안독립중대로 전출 왔거든요. 정말 당돌했습니다. 일병 나부랭이 주제에 감히 하늘같이 높으신 연대장님께 "제가 가장 존경하는 이OO 대위의 부대로 전출을 희망합니다"라고 청하다니요.
제가 지휘관으로 모시고 있는 이곳 해안독립중대의 육사 출신 중대장은 바로 전 보직으로 저와 부원이가 함께 생활했던 기동중대장을 1차 중대장 보직으로 역임했습니다. 제가 일병으로 진급할 무렵, 육사 출신 중대장은 이곳 해안부대로 떠나셨습니다. 연대장님께서 흔쾌히 허락해 주신 덕분에 저는 해안독립중대로 내려가서 이OO 대위 휘하에서 군 생활을 마무리할 수 있게 되었답니다. 그분의 근황이 궁금하여 인터넷 검색을 통해 알아보니, 몇 해 전에 대령을 달았고, 제32사단 산하 보병여단장 보직을 이수하셨더라고요. 워낙 훌륭하신 참 군인이라, 장군 진급도 무난하게 하시리라 믿습니다.
제가 러시아어를 배우면서 사용했던 사전입니다. 20년 넘게 쓰면서 뒷표면은 찢어져버리고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습니다
"러시아어 하신다고 들었는데, 잘 돼 가십니까"
저는 부원이가 올 때까지 그새를 참지 못하고 부대 상황실 전화기로 기동중대에 연락을 넣어 미리 자랑을 늘어놓았답니다.
러시아어는 강세가 중요한 언어입니다. 사전에는 강세가 표시되는데, 일반적인 문서에는 그렇지 않습니다. 따라서 강세를 기억하지 못하면 글을 소리내어 제대로 읽을 수 없습니다.
저는 키릴 문자를 쉽게 외웠지만, 테이프의 러시아 원어민 발음이 글자 생긴 대로 나지 않는다는 걸 곧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를테면 알수의 노랫말에도 나오는 단어, 목소리를 뜻하는 'голос'를 키릴 문자 발음 규칙대로 읽으면 '골로스'가 되어야 하지만 아무리 들어봐도 '골러스'에 가깝게 들립니다. 러시아어는 강세(ударение)를 갖는 모음만 제소리를 내고, 강세가 없는(unstressed) 모음은 제소리를 못 내는, 발음이 꽤 까다로운 언어더라고요. 즉 모음 약화(vowel reduction) 현상이 일어나는 언어입니다.
제가 구입했던 러시아어 교재는 앞부분에서 "모음 o는 강세를 받지 않으면 a로 발음된다"는 둥 모음약화를 간단하게 설명했으나, 그 설명만으로는 궁금증이 해소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만 늘어날 뿐이었습니다. 군대에 있으니 다른 자료를 이것저것 찾아볼 수도 없어서 답답할 노릇이었지요. 그런데 20년이 더 지난 요즘 나오는 교재를 들춰 봐도 모음약화를 제대로 설명한 교재가 딱히 없습니다.
출간된 지 50년도 더 지난 '러시아어 음성학(The Phonetics of Russian)'이라는 낡은 책을 학교 도서관에서 빌렸습니다. 이 책으로 20년 묵은 가려움증을 해소했습니다. 러시아어의 음소(音素, phoneme)도 영어 못지않게 꽤 다채로운 얼굴을 내밀더군요. 러시아어 말소리를 한글로 옮겨적는 전사(傳寫)가 쉽지 않으므로, 초급 단계에서 이 복잡한 음성학적 규칙을 다 설명하다가는 이제 러시아어에 발을 담그는 초심자들이 솥뚜껑에 손 데이듯 화들짝 놀라 달아날지도 모릅니다. 그래서는 책이 안 팔릴 겁니다. 최대한 간략하게 짚고 넘어가야겠지요. 외국어 교재 쓰는 게 그리 쉽지 않답니다.
그렇다면 러시아어 사전에 발음기호을 친절하게 달아주면 얼마나 좋을까요? 챗GPT에 물어보니 러시아어 모음약화에도 규칙이 있으므로 사전에 굳이 발음기호가 필요 없으며, 외국인 학습자를 위하여 발음기호를 달아놓은 사전도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아직 그런 사전을 발견하지 못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