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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어 키릴문자 33개 외우기는 어렵지 않았다

러시아어와 첫 만남

by 이준영

제가 해안독립중대로 전입하기 전에 근무했던 연대직할부대에는 유별난 후임병이 한 명 있었습니다. 러시아에서 유학하다 말고 입대했고, 아버지가 외교관이라고 했습니다. 정확하게는 영사라고 했던 것 같은데, 행정반에서 "통신보안!"을 외치며 받았던 전화통에서 별이 도대체 몇 개인지 모를 국방부 장군이 다짜고짜 그 후임병을 바꿔 달라고 해서 화들짝 놀란 적이 있습니다.


그때는 '영사가 이렇게 높은 자리이구나'라고 생각을 했었는데, 그 후임병의 아버지가 오랜 공관 근무를 거치면서 무관(武官)들과 한 공간에서 생활했을 터이고, 그래서 나름 군에 인맥을 쌓아왔던 것이겠지요. 저는 이제 일병을 갓 단 2소대 짬밥 '찌끄레기'였고 그 후임병은 화기소대 막내라서, 그와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아직 외국엘 한 번도 나가본 적이 없어서 외국 생활이 궁금했던 저는 호기심이 발동하여 그 후임병에게 틈날 때마다 러시아에 대해 꼬치꼬치 캐물었습니다. 하지만 러시아어를 배워보겠다는 생각까지는 들지 않았고요. 내무 생활이 빡센 그 부대에서는 그게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일이기도 했지요.




그동안 제가 배워봤던 영어와 스페인어와는 달리, 러시아어는 키릴문자라는 독특한 문자를 쓴다는 것 정도는 상식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빗자루를 든 레닌이 사회주의의 적(敵)이라는 자본주의자들과 성직자들을 지구에서 쓸어내 버린다는 소련의 체제 선전 포스터에서나 키릴문자를 본 적이 있었습니다. 키릴 문자가 모음자 10개, 자음자 21개, 기호자 2개, 총 33개 글자로 된 문자 체계라는 것은 방금 배달받은 러시아어 교재 첫 장을 열어보고 나서야 알았습니다. 러시아어와의 쑥스러운 첫 만남은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까다로울 것 같은 키릴 문자를 완전히 익히는 데는 시간이 생각보다 그리 많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키릴 문자가 하늘에서 뚝 하고 갑자기 떨어진 게 아니라 서양 문명의 발상지인 그리스 문자에서 빌려 온 것이기에 로마자와 겹치는 부분이 꽤 많았습니다. 스페인어처럼 모음 'A'에는 '아' 소리가 나고, 'O'에는 '오' 소리가 나고, 자음 'M'에는 'ㅁ' 소리가 나는 겁니다.


키릴 자음자 '에르(Р)'는 스페인어 단어 '뻬로'(perro, 우리말로 '개'라는 뜻)를 발음할 때처럼 혀를 입천장에 대고 부르르 떠는 전동음인데 영어의 'p'와 자꾸 헷갈렸습니다. 러시아(Russia)를 러시아어로 'Россия(라씨야)'라고 적는데, 혀를 떨면서 'ㄹ'을 발음합니다. 그리고 스페인어에는 없고 키릴 문자에만 있는 '쩨(Ц)', '체(Ч)', '뻬(П)' 같은 자음자는 따로 암기해야 했는데 그게 그렇게 힘든 일은 아니었습니다. 저는 문자 체계가 완전히 다른 아랍어를 전공하는걸요. 교재에 나온 단어들을 반복하고, 또 반복해서 읽다 보니 이제는 교재를 안 보고도 키릴 문자를 읽을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습니다. 나 홀로 PX에서 하릴없이 남아도는 게 시간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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