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어가 얼마나 어려운 줄 모르고 정말 겁도 없이 덤벼들었습니다. 휴대전화도 인터넷에 연결된 피시(PC)도 없었던 군대라는 폐쇄적인 환경에서 1년이 조금 넘는 시간 홀로 PX를 지켰기에,이 어려운 외국어에 지치지 않고 끈기 있게 달려들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원어민 음성 녹음 카세트테이프가 딸린 러시아어 첫걸음 교재를 군부대로 주문하기로 했습니다. 당시에는 병사가 부대 안에서 인터넷을 사용할 방법이 전혀 없었습니다. 하지만 부대 밖으로 잠깐 나가서 온라인으로 책을 주문할 틈이 제겐 있었습니다. PX병인 제가 부대 내 커피자판기를 관리했기 때문입니다.
원래는 민간인 업자가 부대로 와서 손수 챙겨야 할 일이었지요. 하지만 우리 해안독립중대는 읍내에서 꽤 멀었습니다. 자판기 몸통을 뜯고, 커피 분말 가루와 물을 채워 넣기 위해 아저씨가 우리 부대로 며칠에 한 번씩 차를 끌고 와야 한다면 기름값이 더 나와서 남는 게 없는 장사일 겁니다. 그래서 아저씨는 자판기 열쇠를 제게 맡겼습니다. 비닐 팩에 담긴 커피 분말 가루를 공급하고, 자판기 내부를 청소하기 위해 한 달에 한 번쯤 부대로 찾아올 뿐이었지요.
저는 수시로 자판기를 뜯어 판매 대금을 정산하고, 아저씨의 우체국 계좌로 송금해야 했습니다. 이게 바로 제가 부대 밖으로 나갈 좋은 핑곗거리였습니다. 송금 날짜가 딱 정해진 것도 아니었습니다. 자판기 아저씨한테 송금해야 한다고 행정보급관한테 간단히 보고만 하고, 외출증 끊을 필요도 없이 부대 밖으로 그냥 나갈 수 있었습니다. 보통 일주일에 한 번 나갔는데, 두 번 나가도 행정보급관이 뭐라 하지 않았습니다.관리병이 검은 속셈을 품고 판매 대금을 잔뜩 모아뒀다 삥땅하는 불상사가 일어나는 것보다, 이렇게 업자에게 성실하게 송금해 주는 게 행정보급관 입장에서는 안심이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수많은 어선이 드나드는 부둣가로 작전 투입되는 병력을 실어 나르는 군용 차량이 우리 부대와 부두 사이를 매일 같이 수없이 왕복했습니다. 차량에 선탑할 간부가 부족하다 보니, 분대장 견장을 단 수송부 선임병이 간혹 선탑을 뛰기도 했습니다. 군용 차량이 부대 밖으로 나갈 때는 운전병 옆에 선탑자가 반드시 동승해야 합니다. 차량 운행 중에 발생하는 모든 문제에 책임을 져야 하는 자리이지요. 저는 군용 닷지 차량 선탑자에게 우체국 가야 한다고 말하고 짐칸에 재빨리 몸을 싣습니다.
닷지 차량은 부둣가에 있는 우체국 앞에 저를 내려놓고 가던 길을 계속 갑니다. 작전 병력을 풀어놓고 부대로 복귀하면서 저를 다시 태울 겁니다. 차가 돌아올 때까지 보통 20분 정도 짬이 납니다. 시골 마을 우체국이라 민원인도 별로 없고 한가합니다. 시간을 아끼려고 송금신청서를 부대에서 미리 작성하고 나왔지요. 저는 송금확인증을 받자마자 고객용 컴퓨터 앞에 앉아서 싸이월드에 접속하곤 했습니다. 친구들 방명록에 "군바리 지금 밖에 잠깐 나왔다"라고 끄적이고, 길 건너편 버스 터미널 매점에서 오늘 자 따끈한 스포츠 신문 한 부를 사 들고 나오는 여유를 부리기에 충분한 시간이 납니다.
저는 러시아어를 배워보기로 작정하고 바로 이튿날 송금을 핑계로 부대 밖으로 나갔습니다. 컴퓨터 앞에 앉아서 인터넷 교보문고에서 러시아어 입문 교재를 검색하고, 적당해 보이는 걸로 골랐습니다. 지갑에서 신용카드를 꺼내 결제까지 마쳤지요.
일주일도 안 돼서 책이 부대에 도착했습니다. 사실 연대 본부였다면, 일개 병사 주제에 온라인 쇼핑으로 물건을 부대로 주문했다간 개념 없다고 욕을 잔뜩 집어 먹었을 겁니다. 게다가 군대에서 책은 제법 민감한 물건이지요. 불온서적인지 아닌지 정보장교한테 보안성 검토를 받아야 반입이 가능하거든요. 하지만 여기는 해안독립중대입니다. 여기서는 중대장이 정보장교요, 작전장교이지요.
행정반에서 줄담배를 태우던 행정보급관은 책을 한 번 쓱 보더니 제게 돌려주면서, PX에서 '에세(esse)' 한 갑 가져오라고 합니다. 저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러시아어 교재를 들고 PX로 잰걸음을 옮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