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13년 차 육아 2년 차
어느덧 399일을 지나는 아이. 내일이면 400일이다. 아마도 글을 올리는 시점에는 400일이 될 것 같다. 이제 걸음마를 한다. 오직 혼자서는 부엌에서 거실까지 뒤뚱거리며 걷고, 나나 아내의 손을 잡고 몇 바퀴를 돌아가며 걷고, 부모의 두 손을 잡고서는 고개를 앞으로 젖히고 힘껏 진격한다. 온 힘을 다하다가 엉덩방아도 찧고 매트에 걸려 넘어지기도 한다. 아이의 걸음마다 그의 고뇌와 집중이 느껴진다. 괄목할만한 도전이다. 다리를 부들부들 거리며, 오른편으로 왼편으로 몸을 기울이다 이내 방향을 정한다. 누군가가 그를 바라보는 믿음의 눈빛과 나 또한 그들처럼 걷겠다는 거울상의 생물학적, 사회학적 모방은 잦은 실패와 조금의 성공을 거친다. 그에게 새롭지 않은 날이 어디 있었던가.
오늘 처음으로 아이를 데리고 파주 아웃렛을 갔다. 자유로를 타며, 자동차 면허도 차도 없었던 내가 아이 덕에 별 경험을 다한다고 아내에게 말했다. 예전에 왔던 기억으로 아이들 옷 매장이 있었고, 그간 애쓴 아내도 살 것이 있을 것 같아 일요일의 행선지로 정했다. 잔뜩 흐리던 하늘이 개고 구름이 나왔지만 날씨는 쌀쌀했고 아웃렛 내부는 괜찮아도 외부가 추웠기 때문에 아이를 유모차에 태우고 담요로 감쌌다. 아직 말을 잘하지 못하는 아이의 의사표현을 세부적으로 듣기는 어려웠기 때문이다. 가끔 손을 만지며 체온을 체크하고 코가 빨개지는 것 같으면 내부로 이동했다. 그토록 준비가 부족해서 미안하지 않은 날은 어디 있었던가.
아이 덕에 부모도 커플 신발을 샀다. 매장 주인은 '아빠'라고 부르기 시작하면 그 소리 듣고 싶어서 여기저기 데리고 다닐 거라고 말한다. 보통의 부모와 내가 삶이 다르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나 또한 신발이 닳도록 아이를 모시고 부모의 욕망을 채우려고 할 것이다. 현명한 소비라며 아웃렛에서 아이의 옷을 사고 집으로 돌아와 아이에게 옷을 입혀본다. 잘 샀다며 부모는 웃고 아이는 한두 번 부모의 얼굴을 보고 웃어준다. 아이의 손을 잡고 거실을 걷다가 노래가 생각났다.
이적의 [그냥 걸을까]
피곤하면 잠깐 쉬어가
갈 길은 아직 머니까
물이라도 한잔 마실까
우린 이미 오래 먼 길을
걸어온 사람들 이니까
..
산을 오르고
강을 건너고
골짜기를 넘어서
생에 끝자락이 닿을 곳으로
아이가 매트 주변에서 주저앉는다. 주말에 아이 노릇 하기도 벅찼을 거다. 차에 적응을 해야 한다며 카시트에서 우는 아이를 달래지 않았고, 어딘지도 모르는 곳으로 아이를 데려가서 옷을 입혀보기도, 이유식을 고구마와 바나나로 때우기도 했다. 아이는 언제나 솔직했다. 전심을 다해 움직이고 울고, 웃고 옹알이를 하고 있다. 주저앉았다가 눈을 비비다가 드러눕기도 한다. 내가 낮잠을 자고 일어나 아이를 재울 무렵이 되었다. 이제 400일이 되는 날 춘분이 되고 낮의 길이는 조금 길어졌다. 창가에 399일째 여분의 빛이 남아있더라도 커튼을 치고 불을 끈다. 아이의 기저귀를 갈고 의례처럼 구름을 닮은 이불 대용으로 쓸 극세사 옷을 입힌다. 아내와 나는 자는 척을 한다. 아이는 나름의 행동방식으로 소리 나는 놀이기구를 반복해서 누르다가 책을 나에게 건넨다. 나는 아이의 인기척을 참지 못하고 책을 잡고 읽는다. 지는 햇빛에 아이의 자는 방에 스탠트를 어둡게 켜놓고 작은 블록 놀이를 한다. 온통 마음속에는 언제 잠을 자고 졸려하나 생각뿐이다.
아이가 눈을 비빈다. 아이는 왜 그렇게 잠을 싫어할까. 아이는 여전히 잠은 끝이라 생각할 수도 있다. 그렇게 전심을 다하는 것은 내일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물건의 유무와 물건의 궤적을 이제야 아는 아이는 보던 휴대폰을 이불 속이나 등 뒤로 숨기면 몇 달 전에는 모르다가 이제는 내 몸 뒷 켠으로 가서 휴대폰을 찾아와 나에게 건넨다. 시간을 알기보다 존재를 이해하고 관계 맺은 사람에게 존재를 확인하고 있다. 시간은 이후에 찾아온다. 아이에게 눈을 감는다는 것은 기약 없음을 의미한다. 아이의 한정된 시간에 집중이 쌓여 언어를 나름 익히고 간절하게 음식을 먹고 살이 오른다. 언제나 아이는 가사처럼 생의 끝자락을 알고 있는 것 같다. 삶은 반복되어 A4처럼 얇게 쌓이더라도 쌓여가며 그러다가 한 순간 훅하고 사라질 수도 있는 것을.
독특한 SF 영화 [맨 프롬 어스]는 영생하는 주인공이 어느 모임에 가서 오직 '말'로만 사람들을 설복시켜서 자신이 늙지 않는 사람임을 증명한다. 그가 예수와 싯다르타였고, 하물며 그 모임의 할머니와 연인이었고, 엄마와 연인이었음도 밝힌다. 종교가 시간의 불안정성에 기댄 언어체계라면 사랑은 불안정한 삶에 유일한 버팀목인 언어체계이다. 종교와 사랑은 시간의 한계에 대한 전혀 다른 종류의 해결책을 제시한다. 주인공의 말이 맞다면 해결책은 시간이 무한한 이의 허무와 허무 속의 허무에서 나왔다고 할 수 있다. 그러고 보면 말이 된다. 아이의 시간이 그토록 빛깔이 진하고 잠이 듦에 통곡을 하는 것은 어쩌면 부모가 잊어왔던 생의 귀중함과 솔직함을 일깨워주려는 이유는 아닐까.
400일, 또 하루가 스며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