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친코] 1편에서 3편까지 리뷰
파친코, 견딘 삶의 우연과 운명
by 산업인류학연구소 박준영 Mar 27. 2022
파친코가 3월 25일 공개되었다. 첫 주에 3편이 애플 tv를 통해 공개되고, 금요일에 하나씩 추가로 공개된다고 한다. 도입부이기 때문에 드라마의 시작과 문제의식, 전개과정을 제시했다. 많은 소개 기사에서도 언급되었듯이, 이 드라마는 '선자'라는 인물이 겪어온 근대사에 대한 이야기이다. 한 인물에 대해 한국사가 아닌 근대세계사로서 접근하는 방식은 국가의 테두리 안에서 국가 간의 대결이 아니라 국가를 넘어선 시야를 제공하고, 국가와 인간, 자연과 삶, 권력의 의미를 들여다본다는 점에서 국내의 문법에만 익숙한 나의 시각을 낯설게 보기에 충분하다.
3편까지 공개된 파친코의 줄거리는 일제 강점기 부산에서 장애인의 딸로 태어난 선자는 폭압적이며 관습적인 차별의 공간에 놓인다. 3번이나 아이가 죽은 선자의 어머니는 무당의 기도로 딸을 낳고, 장애가 있는 아버지는 차별의 당사자이지만 굳은 의지로 딸을 지켜내려고 한다. 그것이 무엇이던 나를 사랑하는 한 사람이 삶을 견디는 이유가 되듯이 선자는 바깥에서 바라보는 아버지가 아니라 자기를 아끼는 한 인간으로서 바라본다. 그렇지만 일제 강점기, 말 한마디로 옥살이를 할 수 있다는 불안감은 공동체를 무너뜨리고 아버지 또한 일찍 세상을 떠난다.
70대 노인이 된 선자는 오사카에 거주하는 자이니치이다. 미국에서 일하는 손자의 방문이 그저 반가워서 음식을 정성스럽게 만들면서도, 손자를 바르게 키우려고 '게으른 미국 사람이 되지 않게' 여전히 음식을 거들라고 시킨다. 손자 솔로몬 백은 외국계 투자은행에서 일하는데 부동산 투자 건을 성사시키려고 뉴욕에서 도쿄로 파견을 왔다. 부동산 재개발을 위해 기존 거주민 보상처리 작업을 하는데 자이니치 노인이 끝내 자기 집을 팔지 않자, 비슷한 사연을 가진 선자를 끌어들여 투자 건에 성공한다.
20대의 선자는 일제 순사들의 호루라기 소리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게 당당한 삶을 살아가다가, 그도 한풀 꺾이는 사건이 발생한다. 그가 사랑해마지 않았던 인물이 유부남이었던 것. 찢어지게 가난했던 그가 성공을 거두고 고향으로 돌아왔다는 것에 동경과 연민을 동시에 느꼈다. '아들'을 낳으면 편하게 먹고살게 해 줄 것이라 공언하면서도 결혼할 수 없다는 그의 당당한 모습은 이후에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 그리고 선자 앞에 또 다른 누군가가, 그리고 선자의 손자 솔로몬 백 옆에는 목소리만 들리는 누군가가 등장한다.
시간을 거스르며 10대, 20대, 70대의 선자를 드러내는 구성에도 불구하고 매끄럽게 영상은 연결되며, 연결 중간중간마다 긴 설명보다 한 장면으로 드러내 주며 충분한 감정과 몰입감을 준다. 지금까지 발견된 파친코의 주제는 무엇일까. 선자는 이후에 아무래도 오사카로 이주를 하는 것으로 보이고, 거기에서 뿌리를 내리며 살아간다. 그의 후손은 자이니치로서 차별을 당하며 일본인들이 꺼려하는 일에 종사했을 것이다. 파친코도 그의 한 종류일 것이다. 한 장면에서 잠시 드러난다. 파친코 사장인 선자의 후손은 영업이 끝나고 파친코를 연다. 파친코는 구슬을 굴려 잭팟을 노리는 게임식 도박 기계인데, 사장은 잭팟을 임의 조정하기 위해서 구슬이 지나가는 곳을 정하는 핀을 살짝 구부린다. 사장은 "사람들은 자리에 앉아 그가 레버를 당기는 힘을 조절하면 잭팟이 터질 것이라 기대하지만, 그것은 아무 소용없다."고 말한다.
선자는 그토록 견디는 시간을 살아야 했던가, 파친코와 삶이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인간 문명의 발달이 가능하다면, 파친코의 조작을 면밀히 들여다보는 일일 것이다. 이를 통해 드라마 파친코에서는 우리 모두 다 소수자임을 보여줄 것 같다. 동양인, 한국인, 자이니치. 같은 사람을 가리키는 다양한 단어는 때때로 강력한 차별의 언어로 다가온다.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거리의 확대가 불러온 문명과 경계의 변화는 세계화를 이끌고 문화적 상대성을 제공했다고 하지만, 여전히 인간은 어느 한 곳에 아늑하게 머물고 싶어 한다. 그렇지만 좁은 생활세계의 영역에서 여전한 차별을 경험하고, 나조차도 상황에 맞도록 내 위치를 규정하려고 한다. 경계를 나누고 우선순위를 정하는 곳에서 누구나 불안을 느끼고 차별을 하려 한다. 서양/동양의 구분, 한국/일본의 구분, 이민자의 구분은 파친코의 레버처럼 현재 위치가 자신의 노력이라는 착각에 빠지게 한다. 파친코 기계 속의 조작처럼 어떤 관념도 사회적 조작을 거치지 않은 것이 없다. 조작을 이용하려 할 때, 인간은 주위에 아무도 없을 알게 되고, 조작에 당할 때 인간은 끝없는 불안에 빠진다. 누구도 소수자이지 않은 적이 없다.
파친코처럼 삶은 무엇인가를 만나고, 이는 현재를 만나게 된다. 무엇인가 만난 과거는 현재뿐만 아니라 미래도 규정할 수 있다. 14살에 유학을 떠난 선자의 손자 솔로몬 백은 일본말과 혼동된 한국말을 구사하고, 일본말도 하며, 영어도 유창하다. 물론 이 시선도 한국말이 모국어인 나의 시선이다. 그가 다양한 언어를 구사할 지라도, 그에게 땅을 팔게 된 도쿄 노인의 말처럼 그는 '할머니가 어떤 말로 꿈을 꾸는지 알지 못하는 손자 녀석들'에 불가하다. 누구는 미래를 이야기하고 자식들의 삶을 말하고 자본이 가진 교환가치를 중요시한다. 그러나 인간은 과거의 중첩에 빠져있고 이전의 향기에 몰입한다. 고향 쌀로 만든 밥이 좀 더 고소하다며, 귀한 밥을 먹었다는 선자와 밥을 가득 담아준 노인의 모습이 왜 감동적으로 다가오는가. 드라마에서 죽으면 고향 땅에 묻히고 싶다는 것과 옛사랑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수화기를 놓지 못하며 붙드는 장면이 등장한다. 나를 그대로 담아주는 곳은 변하지 않은 유년시절의 기억이나 그곳을 지탱하는 냄새 가득한 땅, 그리고 지금의 내가 아닌 예전의 나부터 알아온 한 인간의 마음이기 때문이다.
속도과 거리를 따지던 근대적 시간과 통일된 가치를 바라던 시대에서 사람들은 불안과 우울을 느낀다. 그것이 꿈과 도박같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흔들 수 없는 나의 뿌리와 내가 부유하지 않고 마냥 기댈 수 있는 곳은 어디일까, 그것은 디아스포라, 이주가 익숙한 것 같은 지금, 두터운 신발을 벗고 맨발로 땅을 마주할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