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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아감벤 읽기 - 1, 서양철학의 계보에서

이탈리아 정치철학자 조르조 아감벤


조르조 아감벤 


 이탈리아 정치철학자로서 그간의 서구 지성사가 그간 ‘이성’을 강조했던 자체가 인간을 억압했던 모든 장치(apparatus)이었음을 지적하면서, 이성이 아닌 ‘몸’의 가능성을 제시하는 철학자이다. 서구 사상사 흐름에서 이성 중심의 주지주의가 소크라테스/플라톤 - 아퀴나스(교부철학) - 데카르트 - 칸트 - 하이데거로 이어지게 되었을 때 서구 문명은 소위 ‘근대(modernity)’가 도래하게 되지만 그것은 2차 대전과 제국주의/식민지로서 이성의 종말을 가져오게 된다. 이에 서구 지성사의 비판은 크게 3가지로 나눠지는데, 지성 자체에 대한 비판, 감정에 대한 사유와 몸에 대한 사유로의 전환을 가져오게 된다. 지성 자체에 대한 비판은 칸트에서부터 이어진 크리틱(critique)을 다시금 밀어붙인다. 어떤 면에서 지성 자체에 대한 비판의 큰 발자취는 마르크스에서 시작되었다.


 플라톤의 이데아가 현실세계 자체를 그림자로 취급했던 것에서 이데아가 ‘신’으로 옮겨진 중세, 그리고 ‘신’ 자리에 인간이 모든 것을 의심하더라도 ‘생각’하고 있는 것만은 맞다고 판단해서 인간의 생각하는 ‘이성’의 무한성을 강조했던 데카르트, 데카르트의 무한한 이성에 제동을 걸고 내가 생각하고 있는 나의 이성인 ‘오성’만은 신뢰할 수 있다고 생각한 칸트는 이성의 한계를 제시한다. 칸트를 중심으로 하는 독일 철학을 이성중심의 대륙 합리론과 영미의 경험론을 통합한 관념론으로 소개하는데, 무한한 이성이 오성으로서 나의 경험의 틀로 만들어진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칸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한한 이성이 있음이라는 정언명령이나 칸트의 ‘한계(apriori)’ 혹은 선험이라는 것 자체가 가정이라면서, 공동체가 합의한 국가가 절대 이성(absoluter geist)으로서 일원론적 세계관 - 곧 경험을 포섭해서 만들어지는 이성 - 으로서의 유심론으로서 이성을 제시한다. 마르크스의 도전은 이러한 철학과 이성으로서 주조된 세계를 물질과 먹고사는 것의 경제라는 유물론으로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를 했다는 점이다. 물론 마르크스나 엥겔스 모두 철학적으로 포이어바흐의 영향을 받았는데, 유물론으로서의 전회를 제시한다.


 거스를 수 없는 힘에 의해 포이어바흐는 마침내 다음과 같은 깨달음으로 향했다. 즉, 세계 창조 이전에 “절대 이념”이 존재했다거나 세계가 존재하기 전에 “논리적 범주가 미리 존재했다”는 헤겔식 생각은, 피안에 창조자가 있다는 믿음이 환상의 상태로 살아남은 것에 불과하다. 우리가 속해 있으며 감각으로 인지할 수 있는 물질의 세계만이 현실이다. 우리의 의식과 사유는 그것이 아무리 초감각적으로 보이더라도 물질이자 신체 기관인 뇌의 산물이다. 물질이 정신의 산물인 것이 아니라, 정신 자체가 단지 물질의 최고 산물일 뿐이다. 물론 이것은 순수한 유물론이다. 그런데 포이어바흐는 여기서 돌연 멈춰 버린다. 

… 우리는 다시 유물론적 관점을 채택해, 현실의 사물을 이러저러한 단계에 이른 절대 개념의 모사(模寫)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머릿속 생각을 현실 사물의 모사로 여겼다. 이렇게 변증법은 외부 세계와 인간 사유라는 두 영역의 일반적 운동 법칙을 다루는 학문으로 환원됐다. … 그럼으로써 개념의 변증법은 단지 현실 세계의 변증법적 운동이 의식에 반영된 것에 지나지 않게 됐다. 이렇게 헤겔의 변증법은 뒤집어졌다. 아니, 물구나무서 있던 것이 바로 서게 됐다.

엥겔스, 프리드리히 2015, 《루트비히 포이어바흐와 독일 고전철학의 종말》, 돌베개.


 이성이라는 틀로서 이성의 갈구가 아니라, 물질과 자연으로서 사유 영역을 확장하게 된다. 이때에 맞춰 이성에 대한 비판으로서 정신이 아닌 ‘물질’을 제시한 마르크스, 이성과 오성에 대한 ‘욕망’을 드러낸 니체, 이성이 아닌 ‘무의식’으로서 인간의 생물학적 한계를 드러낸 프로이트를 근대 사상사의 망치를 든 철학자들이라고도 한다. 하이데거는 이들의 영향을 받아서 하이데거는 이성과 오성이든 간에 결국에 변화한다는 것으로서 ‘시간성’을 부여했다. 하이데거의 서구 사상사 측면에서 활약은 시간과 변화라는 측면에서 큰 발자취를 마련하지만, 그가 죽음으로 달려가는 인간의 실존으로서 ‘존재’를 제시하며, 당위(sollen)로서가 아니라 자신의 존재(sein)로서 거기에 있다는 현존재(dasein)를 강조한다. 그런데 그가 강조한 현존재로서 현실의 권력을 정당하게 탈취한 나치는 현존재로서 하나의 영웅(자라투스트라)이 되고, 영웅으로서의 생물학적 우월성을 드러내며 우생학을 통해 열등한 유태인과 집시, 성소수자, 장애인 등을 가스실에서 600만 명 이상 살해하는 반면에 물질문명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중산층’의 기반이 되는 오너드라이버, 일과 삶의 균형, 주 5일 근무제 등의 제도를 실현하면서 프로이트, 마르크스, 니체의 비판을 환원하면서 영웅적인 국가인 독일을 만들어낸다.


  하이데거는 사상사에 영향을 미쳤으나, 2차 대전 이후 모든 사상가들은 하이데거의 틀에서 벗어나고자 애를 썼다. 하이데거의 틀에서 시간적 한계가 있는 이성의 집합체인 현존하는 국가를 긍정했다는 것 자체가 한계였음을 지적하는데, 국가 이성의 정수인 법을 긍정하면서 절차상 문제가 없는 서구의 이성(nomos)을 비판하면서, 발터 벤야민은 역사 철학 테제 등에서 법을 포함한 문명에 대한 비판이나 신에 대한 비판을 이어간다. 특히 벤야민은 ‘법’ 생성의 폭력과 법 보존의 폭력으로 나누는데, 법 생성은 곧 헌법과 같은 순수한 체계이며, 그러나 현실에서 순수한 체계를 보존하기 위해서는 형벌제도와 같은 폭력의 형태를 띤다. 이는 국가 권력의 정의를 ‘예외 상태를 의사 결정하는 힘’으로 규정한 칼 슈미트의 언설에서 드러나는데, 슈미트가 이러한 힘을 긍정했다면 벤야민의 성과는 동시에 그 법 바깥의 징후와 인식을 드러내려고 했다. 벤야민을 비판적으로 참조한 프랑크푸르트 학파는 ‘계몽의 변증법’을 중심으로 칸트가 강조했던 이성을 다시 찾으려 한다. 다시금 칸트로 돌아가 목적으로서의 이성과 도구로서의 이성을 구분해서, 그간 도구로서의 이성으로 계몽이 강조되면서 폭력이 자행되었음을 비판했고, 비판으로서 그나마의 이성을 다시금 지지하지 않을 수 없다며 하버마스의 경우에는 사람들끼리 합의하는 ‘의사소통’으로서의 이성의 재강조가 필요하다는 의사소통 행위로써 이성의 복구를 주문하고 있다. 


  2차 대전 이후 이러한 흐름과 연장선상 혹은 비판으로서 미셸 푸코는 근대 문명의 비판을 이어간다. 푸코는 인간의 몸을 규정하는 앎의 체계 - 곧 에피스테메(episteme) - 가 계보학적으로 변화해왔음을 지적하면서, 예전에는 마을에 같이 살았던 광인들이 근대 병원체계와 의학이 나오면서 정상/비정상을 구분하며 격리되어왔고, 형벌로서 처벌의 체계가 경제체제를 단속하는 형태로 변경되어 왔음을 지적한다. 중세에 노동을 중심으로 신체형을 드러내려고 했는데 근대에는 노동이 시간으로 환원되며 감금형으로 변경했다는 것이다. 이는 문명이 점점 나아지는 것이 아니라 억압하는 방식의 변경이며, 지식과 체계를 포함한 이러한 권력의 체계 성이라는 체계를 규정하는 섹슈얼리티(sexuality)를 포함한 계속된 관계망의 재생산된다고 밝혔다. 


 68 혁명 이후에 등장한 들뢰즈는 이성의 측면이 아니라 혹은 정동(affection)이 이성 중심 문명에 대한 비판이면서 탈출구가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들뢰즈의 주장에는 그간 데카르트를 중심으로 이어져왔던 이성 중심 사고 곁에는 이성과 감정, 곧 몸과 정신을 함께 강조했던 스피노자를 중심으로 키에르케고르 - 쇼펜하우어 - 니체를 다시금 꺼내 든다. 몸이 절제의 수단이었던 것이 아니라 몸이 마지막 남은 가능성으로 제시되었고, 서구 사상사에서는 20세기 중후반부터 몸에 대한 재고를 시작한다.  


 아감벤은 다시금 그리스 고전으로 돌아가서 아리스토텔레스가 가졌던 모든 곳에 있는 이성으로서의 가능성을 몸의 가능성으로 전환하고, 주요 철학자들이 남겼던 문헌이 아니라, 그리스 시대 예전에 몸을 사유했던 조각들을 발굴해내고 있다. 아감벤이 벤야민의 법철학 비판을 그대로 받아서, 몸의 법적 상황으로서 bios와 몸 자체로서 zoe를 구분하고, 문명이라는 장치에 한계가 있는 bios보다는 몸 자체의 zoe가 가능성으로 이야기하면서, 가장 문명 바깥이면서 구원의 가능성으로서 homo sacre(호모 사케르)를 제시한다. 


 호모 사케르는 정치의 끝이면서 정치의 시작인 양면성을 지닌다. 그간 정치, 문화, 사회 등 어떤 형태의 장치(apparatus)에 의해서 사회적 몸(bios)으로 규정되는 정치의 종말을 고하고, 순수한 몸, 몸 그 자체(zoe)의 가능성을 시작하려는 시도이다. 그가 주목하는 몸, 몸 덩이, 집단의 몸, 벌거벗음의 사유는 이후에 다양한 저작들에서 주체로서 고정되는 것이 아니라 행위의 변화를 포착하는데 집중하고, 멀리 떨어져 있는 구원, 신, 타인이 아니라 한계 있는 몸으로서 지금의 해방을 구한다. 겨우내 그의 저작들을 조금씨 다시 얽으면서 준비할 것들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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