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 흔적 - 첫 눈물

일상의 자국

SNS 광고로 처음 알게 된 소설가 현기영, 그가 장편 소설 [제주도우다]를 발간했다고 한다. 도서관에 앉아 다른 저자의 글을 보려다 소설가의 이름이 생각나 도서 검색을 했다. 몇 권 책을 둘러보다가 [지상에 숟가락 하나]를 봤다. 1999년에 발간되어 MBC 책 소개 프로그램에도 선정되었던 책이다. 아내는 그 책의 이름이 기억난다고 하는데 책에 무심했던 스무 살 그때, 나는 그 이름을 기억할리가 없었다.


자전적인 이 책을 정말 오랜만에 한숨에 읽어낼 수 있었다. 토요일 아침에 아이가 노래가 나오는 놀이기구를 켰을 때에 거실 매트에 앉아 벽에 기대서 무릎에 놓아 책을 읽고, 베개를 놓고 누웠다가 지겨워지면, 책을 다른 베개에 기대어 놓고 읽다가 졸았다를 반복했다. 아이가 점토 놀이를 할 때 점토 뚜껑이 열리지 않는다고 목놓아 울 때 잠시 아이를 돌보다가, 휴대폰 사진을 보겠다고 할 때 휴대폰을 못 찾겠다고 했다가 다시금 책을 읽는 등을 반복하다가 48쇄가 찍혔다는 책의 마지막 쪽을 덮었다.


자전적인 소설은 시대와 인물이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가공할 필요가 없다는 점에서 현실감을 획득할 수 있고, 그 안에서 꽤나 유명한 소설가가 담백하게 밝힐 수 있는 이야기 속에서 나와의 공통점을 찾고 잠시 나도 그런 글을 써볼 수 있는가에 대한 까닭 없고 노력 없는 동질감을 느끼게 되기도 한다. 나처럼 눈물샘이 극도로 발달해서 언제나 울보였다는 그의 솔직함은 그 말을 흘려내기까지, 그리고 활자로 남아서 고여있음을 알기까지 지난한 단련의 시간이 필요다는 것을 조금 감지할 뿐이다.


딸아이가 점토의 뚜껑이 열리지 않아 우앙 우는 '울음'이 아닌, 자아가 어느 정도 구성된 다음에 세계와 나의 단절을 느껴 처음으로 '눈물'을 흘리는 것은 나에게는 언제였을까, 저자의 책을 계속 붙들 수밖에 없었던 그 눈물, 그 근저에 깔려있는 '아버지'에 대한 복잡한 감각에 내 생물학적 아버지보다 더 연배가 높은 큰 아버지 격인 그에게 유사한 동시대 감각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도서관의 수많은 이들의 희로애락이 덧붙여진 낡은 책갈피 속 깊은 손때를 보며 웃음과 울음이 나 책 속에 시큰한 코 끝을 박아 댔다.


내가 감각하는 첫 '눈물'은 중환자실의 아버지 모습을 보고 넓은 거울 속 울고 있는 나였다. 군산에서 축사를 하던 아버지는 지금은 사라진 개정병원에서 남은 음식을 실어다가 개돼지를 키웠다. 조악했던 그 공간은 내 부모에게는 처음 맞이하는 자족의 공간이었을지 모른다. 그와 그녀의 나이 30대 후반, 지금의 나보다 더 어린 그들의 생계수단인 오토바이 앞으로 8톤 트럭이 부딪혔고, 아버지는 일주일 간 의식이 없었다. 신앙으로 고됨을 견뎌왔던 어머니, 그리고 그보다 더 슬퍼할 할머니, 기타 등등의 가족들은 전주 예수병원 중환자실에서 천주교와 개신교로 갈라지긴 했지만 '예수'를 부르짖으며 살려달라고 기도를 했다. 현기영의 소설에 등장하는 누군가처럼 절름발이 노름꾼이었던 친척도 술주정도 하지 않고 '예수'를 불렀다고 하니, 없던 예수도 놀라서 소원을 들어준 것인지 아버지는 장애를 가지게 됐지만 뇌수술을 마치고 극적으로 중환자실로 옮겨질 수 있었다.


온몸에 흰 붕대를 남고 중간중간 검은 고무 패킹이 있는 흰 호스를 물고 허옇게 누워있는 아버지를 봤을 때 나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던 것일까, 나와 누나가 철봉처럼 아버지 양팔에 매달려도 끄떡없었고, 오래된 축사에 넓은 방에서 온 가족이 누웠다가 연탄가스를 마셔서 정신이 몽롱할 때도 끄떡없었던, 살찐 돼지를 심하게 구타하면서 삶의 범위를 지키려 했던, 그가 영역으로서 가족뿐만 아니라 인간으로서 삶과 죽음의 경계까지 넘나드는 시기에 나는 무엇을 느꼈기에 울었던 것일까.


죽음이라는 감각이 없었던 시기에 중환자실의 모습은 말 이전의 감각, 인간이전에 생물이라는 '숨'에 대한 두려움에서 비롯했다고 밖에 볼 수 없다. 어떠한 물질의 조합에서 우연히 시작된 산소에 대한 갈구, 그 산소를 지키고 진화를 택하게 된 어떠한 구분과 경계 속에서 탄생한 생명은 그 세포막, 원형질이 터지기만 하면 당연하게 영원한 자유와 시원으로 돌아갈 수 있을 텐데, 그 경계를 지키려고 안간힘을 쓴다. 혹은 쓰려한다고 학습해 왔다. 고통, 아픔의 근원은 살을 누르는 감각과 압박에서 등장하는 것처럼, 별에서 온 원소와 물질로 이뤄져 우연히 조합된 이 산물이 경계로서 '숨'의 끊어짐을 특별히 여겼던 근원적 경외와 두려움의 감각이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이런 표현조차 한 방울의 흐느낌보다 누추하다.


어쩌면 몇 번을 등장할 아버지라는 존재는 무관심하다면 쓸 필요도 없을 것이기 때문에 사랑과 증오 잠시나마의 존경, 그러면서도 회환의 대상임을 알게 된다. 이제 시간을 감각하지 못하는 과거의 몸덩이로써의 아버지의 흐릿해진 눈을 보며 우스개 소리를 할 수 있다면 나는 눈물샘을 조금 단련했다고 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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