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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브로] 이재훈 소립자의 뼈

말의 몸, 몸의 말, 쏟아지는 장면과 관념을 말하기

소립자의 뼈 / 이재훈 


사제가 뱉어놓은 말이 검은 소문을 지나 하수구 밑에서 삭아가고 있다. 정지선에서 좌회전을 기다리는 깜빡이 소리가 심장을 두드린다. 한 알의 말이 썩는 시간, 한 겹의 껍데기가 말을 감싸는 시간.


 늘 견디지 못하고 날 것을 먹었다. 살갗을 전시하고 도륙했다. 목표는 죽는 것. 새벽 기차를 타고 벼랑을 향하다가 허연 거품을 머금고 부패해 가는 말 무더기를 보았다. 뻘겋고 뜨겁고 두툴두툴한 혀를 내놓고 징그럽게 웃는 말. 


 당신을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먼 들판의 말이나 깊은 골짜기의 말이 내게 위안을 준다. 퉁퉁 부은 눈으로 드라마를 보거나 술이 덜 깬 입으로 평화를 얘기하는 일상. 오랜 시간 갇혀 지냈다. 


 사랑의 말을 모르는 사람. 기쁨의 말을 모르는 사람. 멀리서부터 동이 터온다. 눈을 감으니 따뜻한 햇살이 눈두덩이를 간질인다. 언제부터 사제의 말을 꿈꾸었던가. 나는 그저 꿈만 꾸는 사람. 


 당신을 새기기 위해 온몸을 부비고 태웠다. 나는 여전히 말을 하기 위해 첫차를 타는 노동자일 뿐. 아마도 당신은 영원히 숨겨야 할 혀의 비밀을 지켜야 한다. 


 들판엔 어느새 눈이 내리고 있었다. 산도 들도 모두 앉아서 엉덩이에 피를 모으고 있다. 심장이 또 저 대지로 흘러갈까봐 꼭 쥐어본다. 말들의 시체. 말들의 평화. 말들의 새벽


 이 시의 상황을 알 수 있는 문장은 무엇일까. '당신을 새기기 위해 온몸을 부비고 태웠다. 나는 여전히 말을 하기 위해 첫차를 타는 노동자일 뿐. 아마도 당신은 영원히 숨겨야 할 혀의 비밀을 지켜야 한다.'로 생각해 보자. '당신을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라는 문장에서 보듯이 지금은 사랑이나 기쁨을 말할 수 없는 노동과 고통의 시기라고 볼 수 있다. 시인의 말이 온몸을 동원해야 했다면, 이와 대비되는 사제가 뱉어놓은 말은 꿈만 꾸는 사람의 말이며, 하수구 밑에서 삭아가고 있는 말이다. 사제의 말은 역설적이게도 썩어가지만 어디선가는 껍데기로 감싸지는 말이다. 종교는 현실의 도피처면서 현실을 견디는 기제인 것을 보여준다. 


 제목이 소립자의 뼈인 것처럼, 물질의 가장 작은 단위는 소립자이다. 신을 대신했던 이성이 밝혀낸 물질의 근원이 깨질 수 없는 원자도 아니며, 원자를 이루는 양성자와 전자도 아니며, 그것을 이루는 것이 '소립자'로 불려지는 것이다. 그렇게 쪼개고 쪼개낸 '말'이 뼈를 이루는 방식이 시인의 말이었다. 물론 말 또한 물질의 세계로 치환할 수 있다. 시인의 말이 처절하고 몸에 붙어있어 바깥으로 드러나지만, 시인의 당신이 숨겨야 하는 말은 시인과의 기억의 말이나 이제는 희미하거나 보이지 않는 것 같은 먼 들판과 깊은 골짜기의 말이다. 사랑의 말, 기쁨의 말이 햇살을 비추듯하며 노동의 아침을 깨우기 위해 눈두덩이를 간지럽히며 사제의 말이 되어버린다. 시인이 따뜻함을 꿈과 사제의 말으로, 어두움을 현실과 시인의 몸으로 표현하며 기존의 관념을 흩어 버린다. 


 뻘겋고 뜨거운 신체, 미뢰가 솟아 두툴두툴한 혀를 가진 시인은 이제는 눈이 내려버린 들판의 말처럼 차갑게 말할 수 없다. 그저 그 뜨거움은 엉덩이 같은 골짜기와 먼 들판에 피를 모으고 있다. 그 피는 뼈라는 조혈세포에서 만들어진다. 그것의 순환에서 드러나는 몸이 가진 아픔은, 여전히 '심장'으로 숨을 쉬며 엉덩이 배설을 받아 뼈를 만들기 때문에 다시금 쥐어본다. 그래서 삶이 언제나 깜박거리는 위기이며 처절하지만, 그 순환을 기다려 본다. 그 몸의 말을 통해 말의 몸을 벼려간다.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물질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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