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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성리더십] 첫 모임 특강의 후기

진성리더십아카데미 20기_1주 차

 진성리더십, Authentic leadership은 개념적 완결과 실천적 도달이 모두 어렵다고 생각한다. 진성리더는 어느 정도 인물과 사례로 드러낼 수 있으나, 그것이 리더십이라는 하나의 사회적 의미를 갖춘 자질로써 제시하기에는 상당한 어려움에 봉착한다. 개인의 종적 고유성을 진성리더십이라는 유적 보편성으로 개념화하는 것이 어렵기 때문이다. 또한 리더라는 어떠한 공동체를 가정한 사회적 지위는 사회적 성취와 인정이 곧 진성 리더십의 실천적 결과인가를 설명하기에도 부족하기 때문에 다시금 어려움에 들어선다. 

 

 곧 어떤 면에서 현실보다 더 나은 시대가 있다는 상상 곧, 요순시대를 제시하는 것, 맑시즘에서 원시적 평등상태와 유사하다는 생각도 든다. 한 번도 도달한 적 없었거나, 순간 스쳐가는 상황의 종합이 진성 리더십이라면 접근과 지속가능한 것인가에 대해 물어보게 된다. 인류학 연구에서 시원의 시대에도 대부분 권력관계는 작용했으며, 그 긴장이 어떠한 형태로 흘러가는 가에 따라서 사회적으로 우선되는 행동 방식이 결정되었다는 것들의 사례로 제시된다. 배블런이 말했던 [유한 계급론]에서 잉여생산물을 어떤 형태로던 얻을 수 있었던 유한계급이 자연스러운 형태가 아니라, 상당한 다툼의 결과였다는 점도 반례로 제시되고 있다. 

 

 파울 끌레의 [타락한 천사]처럼, 언제나 도래한 적 없으나, 뒷걸음치는 듯, 앞을 보는 것 같지만 뒤로 물러서는 듯한 진성리더십에 대한 끌림과 주저함은 "진성 리더십 아카데미 첫 오프 모임"에서 제시한 '윤리적 자유'에서 무릎을 치게 되고, 또한, '한 끝 차이'라는 솔직한 제시를 통해서 고개를 끄덕이게 됐다. 여전한 의문점은 오래도록 성찰을 해보도록 하고, 진성 리더가 되는 어렵고 선한 길을 택하는 것에서부터 진성 리더십을 언어와 실천으로써 구성할 수 있도록 하는 수밖에 없다. 


 인상적인 특강의 주제어는 첫 번째, 위에 제시한 대로 '윤리적 자유'였다. 이는 박수칠 때 떠나라와 유사한 느낌이었다. 어떤 리더이든 간에 자신의 소명이 공동체와 일치하고, 그것을 일정 수준 이루었을 때, 그것이 다 자신의 성과 인양 받아들여서 자신의 이름을 남기거나, 권력을 강화하는 방식이 아니라 소요유처럼 떠나는 것이다. 특강에서 제시한 선승 임재의 대표적인 말처럼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여라'는 것처럼 무엇보다 나를 높이 세워준 조직마저 내 것이 아니라고 인정하는 마음이다. 물론 동시에 현실에서 사람들은 고민하게 된다. 과연 윤리적 자유의 실천적 형태가 진성리더의 계승을 만들어냈는가라는 공동체적 문제의식과 진성 리더를 잡는 수많은 잠재적 진성 리더들의 인간적 관계와 존중을 끊어내야 하는 괴로움에 빠질 것이다. 


 이는 '한 끝 차이'로써 가스라이팅과 셰르파로 구분된다는데 있다. 소위 '영향력'으로 일컬어지는 권력의 미시성은, 권력 자체가 공동체의 삶의 방식으로 긍정적 작용을 한다는 현상이 곧 개인에겐 부정일 수 있다는 점에서 가스라이팅과 셰르파 어떤 곳을 삶에서는 유동하고 때로는 절충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 보게 된다. 


 그렇다면 이러한 윤리적 자유와 한 끝 차이로써 진성리더십의 달성은 차지하더라도 그 순간의 괴로움은 어떠한 리더십 방식보다는 훨씬 더할 것이다. 그것에 제시된 것이, 곧 사명, 비전, 가치의 진북(Truth North)은 고난, 각성, 긍휼감의 진남(Truth South)을 가리킨다는 나침반의 비유였다. 사명, 비전, 가치는 설명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자. 진북이 제대로 사람들에게 방향과 끌림으로 다가오려면, 진북의 계속된 제시가 아니라, 그저 함께 공감하고 돕기 위해 연민하고 그 행동방식이 관계를 확장하는 긍휼로 펼쳐진다는 점은 인상적이었다. 그렇지만 그 긍휼은 단순히 사람이 좋다는 착함이 아니라 구별된 선함이라는 점이다. 이는 무엇인가 리더라는 권한이나 외치는 구호로써 도달하지 않으며, 공동체와 그 구성원을 믿고 함께 동고동락하는 모습에서 찾아질 수 있다. 

 

 물론 여기서도 계속된 의문은 들 수 있다. 당연히 이것은 의지와 욕망의 제한에 대한 의문일 수 있다. 곧, 진남의 긍휼, 동정, 연민은 리더와 팔로워에게 같은 무게로 다가올 수 있는가의 문제이다. 박경리 문학관에 커다랗게 쓰여있는 그 문장 '사랑 중에 최고의 것은 연민'이라는 것은, 연민을 베푸는 이와 받은 이에게 모두 질문이 필요하지 않는가의 의미이다. 또한, 모든 리더가 진성리더가 아닌 경우, 자원을 쥐어짜고 겁박과 유혹을 통해서 더 나은 사회적 성과를 달성한 리더에게 더 중책이 맡겨져서, 진성 리더의 인간에 대한 예의가 인간 서로의 불안으로 작용할 때, 그 상황을 그저 숨죽여 바라봐야 하는 가에 대한 의문이다.  


 이 의문은 먼저 나에게 묻는 의문이다. 나는 유일한 무엇이 되어 영향력이 있으면 좋겠다고 말하면서도, 대체되는 것을 불안해하고 있지 않는가에 대한 윤리적 자유와 먹고사니즘의 욕망 속에 있다. 그것이 나를 둘러싼 환경과 말할 때 앞에 나서는 것을 주저하게 되는 겸손과 체념의 '한 끝 차이'에 있다. 일단 성공부터하자는 그것, 그래서 수신제가하는 실천적 방식과 수신이면 됐지 하는 성찰 속에 다시금 주저하는 합리적 비관에서 부유하는 상황이다. 그것이 북극성에 살지 못하는 지구적 변명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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