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12년 차 육아 0년 차
어머니는 항상 반찬을 가득 싸주신다. 아이 없이 아내와 단 둘이 산 12년 동안 그랬다. 댁에 갈 때마다 '집에 다 있어요, 아직 남았어요'를 연발한다. 그래도 '마트에 가면 있어요'라는 말은 점점 삼가게 된다. 뻔히 어머니는 '가게에 있는 거랑 같냐. 괜히 돈을 쓰고 그래'라는 말이 나올 것이기 때문이다. 뺏겠다는 것도 아니고 주겠다는데 받는 사람이 참 염치도 좋다. 장모님도 묵은지는 물론, 며칠 지나지 않아 익어버리는 겉절이를 한 가득 담아오신다. 겨우내 천천히 먹으라며 파래보다 연하고 매생이보다 실한 '감태' 무침을 한 통을 해오셔서 은근히 먹고 있다. 염치가 낭비인 관계이다. 사랑을 그토록 낭비하는 부모의 습성이다. 음식은 냉장고가 없었다면, '장'문화처럼 저장 식품이 없었다면 금세 상하기 쉽다. 음식은 변하지만 당신의 마음은 한치도 물러선 적이 없다.
절약은 소유를 기반으로 한다. 낭비는 무소유를 기반으로 한다. 혹은 여유와 자유를 바탕으로 한다. 소유의 개념이 성립되지 않았던 그 옛날, 자연은 낭비를 허락했다. 혹은 자연은 상대적 부족보다 나름의 충족을 이끌어 왔다. 시간에 따라 결실이 있으며 사시사철 꽃이 필 정도면 먹을거리도 어느 틈에나 있게 마련이다. 인간의 정주 이전의 시기 먹을 것을 구할 뿐 재배하지 않던 때, 움켜쥘 것도 지킬 것도 없었다.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성경과 꾸란에서는 '만나'의 축복을 말한다. 파라오의 피박을 받던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로 탈출해서 약 40년을 보내는데, 광야의 초기 이집트(애굽)에서 가져온 식량이 다 떨어져 원성이 자자해졌다. 신 야훼는 새벽녘에 하늘에서 달콤한 과자인 '만나'를 비처럼 내려줬는데 그것은 많이 가져가게 되면 쉬 상해버렸고, 흘러넘쳤기 때문에 서로 빼앗아갈 일도 없었다.
시간의 개념도 지금과 달랐다. 갑작스러운 인간의 죽음과 자연의 변화에서 시간이 반복되거나 특정 시점으로 기억이 날 뿐이었다. 지금처럼 세계 공통의 시간을 쓰는 것, 시간을 절약해야 한다는 것은 어색한 일이었을 것이다. 다만 그때 화산이 터진 날, 개똥이가 태어난 날, 엄마가 아이를 낳은 날은 뚜렷하게 기억하며 '그날'은 관계를 형성한다.
지금은 시간과 자원은 절약과 관리 대상이다. 미래를 준비하고 내세를 준비해야 하기 때문이다. 소유 개념이 비약적으로 퍼진 것은 역설적으로 기독교의 영향이 컸다. 현세의 성공이 신의 축복이라고 주장한 베버의 청교도주의(프로테스탄티즘)는 절제하고, 번영하라 충고했다. 신 안에서의 만족을 말했던 성경은 어느새 물질적 성공의 정도가 신의 축복이라는 해석으로 바뀌었다. 열심히 사는 것이 곧 내세의 구원이라고 여겼던 것은 어느새 사회적으로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는 냉정한 격언으로 퍼졌다. 인간의 자립을 말하며 물고기를 주지 말고 물고기 잡는 법을 가르치는 것이 현명하다고 말한다.
사랑과 행복은 절약과 관리가 아닌 낭비의 영역이다. 보존하고 기다릴 수 있는 사랑은 없다. 행복은 냉동실에 얼려둘 수가 없다. 이것만 참으면, 이 고비만 넘으면 아쉽게도 관계는 사라져 있다. 누이의 말 '부모는 항상 최선이라는' 그 문장이 쉽게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어떻게 효율적으로 혹은 효과적으로 육아를 할 것인가는 여전히 투입 대비 산출을 요구한다. 그러나 산출이 아이의 인생이라는 무한한 시간 아래 있다면 효율과 효과는 무의미하다.
어머니는 나를 기르면서 얼마나 짜증이 났겠나 싶다. 내가 다른 사람에게 안기지 않고 부모에게만 안기려 했는지, 다른 음식은 먹지도 않고 젖은 그리 오래 먹었는지, 그 당시 어머니는 어떤 고통에 놓여있었겠나. 그 날들은 당신의 엷어진 지문과 추억 속에 나의 몸과 내면에 있다. 어머니는 아내에게 내가 어릴 때 말썽한 번 부린 적이 없다는 결코 성립될 수 없는 말을 서슴지 않았다. 그 낭비 가득한 말에는 한치의 양보 없는 나를 위한 혼신이 느껴진다. 나의 구석기는 부모였고 나는 곧 아이의 태곳적 그날을 만들어 간다. 나도 아이를 소유할 수 없으니, 아이에 대해 유통기한이 항상 만료되는 사랑을 낭비해야겠다. 역시 육아의 한 치 앞도 모르고 나는 말을 낭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