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12년 차 육아 0년 차
15년 전 기업의 신입사원 연수 4주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그때는 양복바지에 흰 실내화를 신었던 독특한 복장 규정과 매일매일 일기를 쓰게 하고 검사했던 군대식 문화가 있었다. 지금까지 나에게 강렬하게 남은 연수 활동은 '암벽등반'이다. 무엇을 애써서 얻었던 적이 없었고 끈기가 없었던 나는 암벽등반이 두려운 도전이었다. 나에게 체육 활동은 적잖이 불편했다. 중학교 때 뜀틀 위에서 구르기 동작을 잘못해서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기억과 군대 갔을 때 수류탄 던지기에 끝까지 실패해서 결국 수류탄을 못 던졌던 기억이 있다. 나는 운동 능력이 좋은 사람이 아니었다. 남들은 아무 관심 없었지만 암벽 등반대 상급 중급 하급 코스 앞에서 역시 두근거렸다. 나는 하급 코스를 선택하고 어떻게든 오르기 위해 기를 썼다. 중급 이상 코스를 했던 동료들이 정상에 매달린 종을 치고 내려오는데 나는 하급자 코스에서 저기 한 팔만 더 뻗어서 올라가야 한다고 벽에 달라붙어 손을 벌벌 떨었다. 아마도 바지가 슬쩍 벗겨질 것도 같았다. 이를 악물고 왼 팔을 뻗어 윗 돌을 잡았다. 오른 팔로 종 치기 매듭을 잡았다. 종소리가 울렸다. 두 발을 지지하고 있던 암벽의 턱에서 발을 떼고 바닥의 매트로 쿵하고 떨어졌다. 나는 웃었다.
나의 일상은 대부분 만족스럽지 못하다. 한두 가지 기쁜 일로 삶을 견디어 간다. 그래서 이 삶을 지탱해야 하는 아이에게 여전히 미안한 마음이다. 마음만 먹으면 무엇을 하나, 아내는 하나씩 실천에 옮긴다. 물건을 사고 집을 정리한다. 아이가 나오기 이제 9일, 마지막 토요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내가 아침부터 집을 치운다. 설 명절에는 아내와 집에서 쉴 계획이기 때문에 전주 토요일인 오늘 처가 식구가 저녁을 먹으러 온다. 아이 용품이 아직 책방 구석에 있다. 책장도 깔끔히 정돈되어있지 않다. 아내가 휴직하면서 가져온 물품들도 있다. 이 많은 것들이 삶에서 다 필요하지 않았을 텐데 모아놨더니 만족스럽지 못한 삶의 부스러기 같다. 나는 주방일을 담당하고 있어서 옛날 아파트의 좁은 주방을 정리해야 한다. 특히 물을 많이 쓰는 주방에서 위생에 좋지 않은 개수대와 선반 사이에 틈이 있고 예전에 살던 사람은 그 틈을 난로 연통의 은색 테이프로 둘러놨었다. 작년에 이곳으로 이사 오면서 나는 그 위에 방수 테이프를 붙였다. 물에 삭은 은색 테이프 위에 방수테이프를 붙였더니 깔끔하지 않다. 방수테이프와 그 아래 은색테이프까지 모두 떼어서 붙이려고 했다. 웬걸 방수 테이프는 실리콘 접착제와 다르지 않았다. 어찌나 떨어지지 않던지 주방의 틈이 더 지저분해졌다. 철수세미를 동원해도 식초를 뿌리고 드라이버와 숟가락으로 긁어내도 벗겨지지 않는다.
잘 안되니까 성질이 머리끝까지 올랐다. 갑자기 아내에게 뭐라고 했다.
"그렇게 지저분하지도 않은 것을 왜 굳이 떼어내서 다시 붙이라고 했냐."
그런데 나도 이런 말을 하면서 유치하기 이를 데 없다고 생각했다. 아내가 테이프가 잘 안 떨어질 줄 알았겠나. 아내는 그저 아이 낳기 전에 집안이 깔끔했으면 좋겠다는 소망만 있었다. 나도 내가 황당해서 살짝 입꼬리가 올라가는데 아내는 쭈볏쭈볏하다가 냉장고에 붙어있는 성큼이 입체 초음파 사진을 가리킨다. 입체 초음파 사진은 3장인데 맨 윗 사진의 성큼이가 잘 나왔고 중간 사진은 무표정하고 마지막 사진은 짜증이 가득하다. 아내는 마지막 사진의 성큼이 얼굴이랑 지금 내 얼굴이 같단다.
"알았어"
몇 마디를 더 퉁퉁거렸다. 아내는 무거운 몸으로 책방의 짐들을 정리하러 갔다. 어떻게 할까 고민했다. 어지러운 틈 사이 무엇을 붙이기도 떼어내기도 어려울 때, 갑자기 15년 전 암벽등반의 하급자 코스가 생각났다.
단단한 실리콘 방수테이프와 은색테이프가 어지럽게 붙어 있다.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별다른 방법이 없다. 스티커 제거제도 소용없다. 그러면 반응속도를 높이기 위해 온도를 올리거나 외력을 강화하는 방법밖에 없다. 인터넷 검색에서는 표면적이 넓은 '자'로 벗겨내야 한단다. 집에 금속으로 된 자가 없다. 커피포트에 물을 끓였다. 집안에서 자와 비슷한 것이 뭐가 있을까 찾았다. 아, 찾았다. 베란다에서 식물을 키우려고 샀던 꽃삽이 있다. 꽃삽의 힘은 흙을 뚫기 위해서 삽의 뾰족한 곳으로 몰리게 되어있다. 꽃삽 면적은 넓었지만 힘의 방향과 맞지 않았다. 왼손으로 꽃삽의 왼쪽 편을 잡고 오른손으로 삽의 자루를 잡고 오른쪽 날로 방수 테이프를 벗겨내기 시작했다. 뜨거운 물을 붓고 칼을 갈듯 부싯돌을 켜듯하니, 본드 같은 방수테이프가 대패질하는 톱밥처럼 조금씩 밀려 나온다. 30분 정도 씨름한다. 싱크대 개수대와 선반의 틈에 있던 묵은 때들이 말려 올라온다. 힘이 부쳐서 손을 바꾼다. 이번에는 꽃삽의 왼 편으로 밀어낸다. 오른손의 힘을 쓴다. 이제 손날을 잡았던 양 손의 검지 마디가 쑤신다. 삽의 자루를 지탱했던 손바닥 중앙이 눌려서 아프다. 뜨거운 물 붓기를 두세 번 반복했다. 물기를 걸레와 키친타월로 닦아내고 드라이로 물기를 말린다. 새 방수테이프를 붙인다. 나는 다시 웃었다. 아내에게 가서 미안하다고 했다. 아내는 이제 첫 번째 성큼 이 얼굴로 돌아왔단다. 방수 테이프 하나에 낑낑대던 내가 안쓰러웠는지 아내는 주방이 확 달라졌다고 한다.
영화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의 대사도 삶을 지탱해준다. 까다로운 꼰대 잭 니콜슨이 헬렌 헌트에게 고백한다. "You make me a better man(당신은 나를 더 좋은 사람이 되도록 한다.)" 인간이 인간답기는 상당히 어렵지만 필요조건은 관계이고 충분조건은 아마도 사랑이며 존경일 수 있다. 아이는 나보다 더 낫기를 바라는 마음은 인간의 근원적인 생물학적 욕망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아이가 도구에서 존재로 바뀐 근대 이후의 관점일 수도 있다. 사회의 진보가 개인의 신장에 있다면 나는 좋은 아빠가 되기 전에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이고 조금이라도 삶의 만족스러운 경험을 가졌으면 한다. 하급자 암벽코스에서 귓가에 울린 종소리, 방수테이프를 떼며 얼얼해진 손바닥은 내가 조금은 좋은 사람이길 바란다는 마음속의 빗자루질이다. 가끔씩 나에게 징을 울리는 그 몸의 감각이 언어 이전부터 바깥으로 나를 감각해온 성큼이에게 최소한의 예의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