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는 26일이 되고, 나는 며칠 되지 않은 여유를 누리고 있다. 아내가 산후관리사를 신청했고 그분께서 일과 중에 집에서 아내와 아이를 챙겨주신다. 같이 있기 서먹하여 바깥에 나왔다. 반납기간이 지난 책을 도서관에 반납하고 오랜만에 봄의 볕을 몸에 담는다. 점퍼의 지퍼를 내린다. 가방의 어깨끈과 어깨 사이에 물이 찬다.
밤, 9시 반부터 12시 혹은 아이가 잘 때까지 나는 아이를 안고 집을 서성인다. 아직 양 손에 적절히 나누어 균일하게 아이를 안지 못해서 오른팔에 주로 아이를 눕히고 왼 팔로 오른팔을 거든다. 삼십여 분이 지나면 슬쩍 뻐근한 느낌도 든다. 내 팔과 아이의 몸에 아이의 배냇 저고리, 스와들업 옷과 내 긴 팔 옷 사이에 땀이 조금 찬다. 아이가 쌔근쌔근 자려다가 갑자기 울어 재낀다. 엄마 젖을 더 빈번히 찾거나 기저귀에 존재 표현을 자주 한다. 가끔 나는 아이를 '이 녀석'이라고 부른다. 아내는 그 표현이 재미있단다.
아침과 밤의 구별이 더디다. 비몽사몽은 그치지 않는 것 같다. 곧 아이는 태어난 지 한 달이 되고, 원더 위크 - 아이가 급격히 변하면서 더 보채는 놀라운 기간 - 를 아내와 함께 보내며 아이를 바라볼 수 있게 된다. 나는 3월 말이 되면 다시금 일터에 가기로 마음먹었다. 마음만 먹었을 뿐 신체의 적응을 고려하지 않은 무리한 스케줄, 변하지 않은 무모함은 사라질 틈이 없이 축축하다.
며칠의 자유를 틈타 도서관에서 작고한 철학자 김진영의 애도일기 [아침의 피아노]를 빌렸다. 한 숨에 읽을 수 없는 간결하고 깊이 새긴 글이 인상적이다. 나는 그의 죽음 앞에 사랑에서 아이의 삶을 투영하고자 했을까.
그가 유한의 시간, 곧 시한부 시간을 보낼 때, 시간은 무한이 아닌 물질이 된다. 그가 쓰고 말했던 독일 철학이 다양한 범주는 있으나 다소 '정신'에 힘을 쏟지 않을 수 없었음에도 그는 삶의 유한 앞에서 몸을 말하고 사랑을 전하고 있다.
그의 자유에 대한 정의
자유란 무엇인가
그건 몸과 함께 조용히 머무는 행복이다.
여덟 어절 속에 무엇하나 뺄 수 없을 정도로 농밀하다. 나의 몸은 어디까지 인가, 아이의 삶. 26일 아이는 온전히 울어 재끼고 온전히 몸부림치며 똥을 진득하게 싼다. 엄마 젖을 그득히 먹다 몇 번을 게워낸다. 아이의 물질 앞에 아이의 음악 앞에서 갑작스러운 조용함, 그 격정과 압축된 시간.
얼굴 본 적 없는 한 철학자가 자기 죽음 앞에 타자를 애도하는 모습과 아이의 순전한 강력한 기쁨과 슬픔을 비추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