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의식의 여행_방배 사당 이수

일요일 저녁 육아빠의 외출

매주 일요일 오후에 장모님이 오신다. 아내는 바깥에서 바람 쐐도 좋다고 했다. 논문을 마치고 몇 주가 지난 지금, 이제 일요일 오후의 한가함을 즐길 수가 있다. 토요일에 어디로 갈지 생각한다. 마음 같아서는 서울과 가까운 강화도에서 바닷바람도 마시고 싶지만 시간이 빠듯하다. 시간은 빠르게 가지만 사람은 더디 움직이는 일요일 오후 세시 넘어 집에서 나와 서울을 벗어나는 일은 만만치가 않다. 해가 긴 여름도 그렇다. 저녁을 밖에서 먹고 바람을 쐬려고 하면 이미 어스름한 저녁이 다가오고 이내 도시와 번화가는 쓸쓸해진다. 그것도 상당한 매력이 있겠으나 그만큼 대중교통으로 금세 도착할 수 있는 어딘가로 행선지를 잡는다. 소위 끌리는 곳이다. 혼자 주어진 예닐곱의 시간, 음악소리도 아까워 이어폰도 가방 깊숙이 넣는다. 마음속 어딘가에서 말하는 곳을 검색하다가 찾는다. 그곳은 밝힐 수 있는 사연도 깊숙한 어둠의 사연도 있는 어딘가이다.


오늘은 이수역의 아트나인에서 영화 [피닉스]를 보려고 했고, 어릴 때 2년간 살았던 동네 사당동에 가기로 했다. 아내가 준 자그마한 숙제를 해결하고 소나기가 그친 사당역에 내렸다. 사당역은 1987년 처음에 서울에 올라온 나에게 언제나 낯선 곳이지만 여전히 궁금한 곳이라고 생각된다. 나는 1986년 아버지의 큰 사고로 직장을 급하게 서울로 잡게 되면서 1987년 2월 말 서울로 올라오게 됐다. 아버지가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밥을 흘리며 먹던 것이 기억난다. 그의 복잡한 삶 속에서 그 앞에 놓인 아이들을 보며 그는 얼마나 참담했을까, 직장을 구해주는 관청 로비에 대자로 누워서 소리를 질렀다는 그의 무모함을 조금이나마 이해해본다.

나는 유치원을 마치고 서울 방배동의 이수초등학교 1학년 3반 3번으로 입학을 했다. 나보다 두 학년이 빠른 누나는 군산에서 입학을 했다가 3학년 전학이 되었으니 나보다 훨씬 더 힘든 시간을 보냈을 것 같다. 그것을 느낄 수 없었던 그때, 누나와 어머니는 한일고속버스로, 아버지와 나는 이삿집 트럭으로 서울로 올라왔다. 나의 부모는 얼마나 가슴을 졸였을까. 보증금 800만 원에 월세 65만 원인가로 기억되는데, 아버지가 어렵게 얻었던 대학병원 경비원 일에 대해서 그가 좋고말고를 이야기할 수 없었다. 빠듯한 삶, 내 용돈은 일주일에 800원이었다.


이수 초등학교 후문이다. 87년에 서울로 몰려들어온 사람들로 혹은 1970년대 중반부터 1980년대 중반 출생까지 우리나라 출생률이 마지막으로 높았던 때, 오전 오후반이 있었다. 1학년과 2학년을 이곳에서 나왔었는데 오후반 오전반의 변화로 어머니는 나를 챙기기가 바빴을 것이다. 빠듯한 삶에 어머니는 의류공장 시다 일을 했었다. 여성의 낮은 임금을 생각했을 때 어머니의 노동은 나를 돌봐야 한다는 것과 집안일을 멈출 수 없다는 것이 중첩되며 상당한 고통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이후에 월셋집에서 '솜씨네 수선'이라고 해서 수선집을 하기도 했었다. 나는 숙제를 하지 못하면 학교를 못 가겠다며 우는 답답한 아이였는데 어머니는 나에게 "융통성 있어야 된다"며 학교가 기를 종용했다. 지금에야 너무 융통성이 있어서 나조차도 고민이지만 그 답답함이 또 다른 나의 힘이 되었기도 했을 것이다. 그것은 상당히 겁이 많았음을 의미한다. 집 근처에는 어릴 때 보기에 상당히 높은 산이 있었는데, 지금 가보니 낮은 동산에 불과했다. 지금은 산을 가로지르는 "도구로"가 생긴 '이수동산'에 가을이면 밤나무에서 밤이 떨어져있었다. 밤 가시가 무서워서 밤을 하나도 까지 못했던 기억이 난다. 오늘도 비가 그쳐 이수동산에 가보니 빽빽한 나무 숲에 동산 정상에는 평지가 있어서 익숙했다.


이제는 형체도 사라졌지만 월세방이 있던 건물은 수정탕이라는 목욕탕 건너편에, 그리고 방배2동 동사무소 옆 대서방의 옆 옆 건물이었던 것으로 기억난다. 아마도 아래 사진의 위치였을 것 같다. 한 달음이면 놀이터가 있었다. 여전히 겁이 많았던 나는 구름사다리라고 타잔처럼 손을 써서 건너는 놀이기구를 타지 못해서 누나가 멋지게 완성하는 모습을 구경하고 있었다. 빙글빙글 돌아가는 놀이기구에서 어지럽지 않으려고 돌아가는 방향 반대로 걸어가기를 반복했으며, 하나에 150원 했던 베이킹소다를 이용한 '뽑기'가 놀이터에 있어서 구경하기 바빴다.


이곳이 가끔 떠오르는 이유는 아마도 내 유년시절의 확실한 기억 몇 개, 그리고 그것이 내 행위의 의사결정을 이루는 주요한 가치가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2학년 말에 집에서 잠시 쫓겨난 적이 있는데, 이유는 남태령이라는 곳에 문구점을 하는 아이가 나에게 돈을 주었는데, 내가 돈을 조금씩 썼다가 내가 돈을 뺏었다는 누명을 썼기 때문이었다. 명확히 하지만 누명과 잘못이 겹쳐있다. 그 아이는 내 앞에 앉아있었고 다리가 부러져서 깁스를 했는데 나는 그 아이의 가방을 들어주었었다. 그 애의 집이 남태령으로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사당동 4거리 건너편의 남현동은 아니었을까 싶다. 오늘 남현동 거리를 갔는데 무언가 익숙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는 가방을 들어주어 고맙다는 표현을 자기 집에서 부모님 지갑의 동전을 훔쳐서 나에게 준 것이었는데, 나는 부모님에게 말하지 않고 형광펜이나 손수건, 학용품을 샀었다. 여하튼 2학기가 마칠 때쯤, 그 아이의 부모가 돈을 훔치는 아이를 발견했고, 그 돈을 어디에 썼냐고 물었더니 부모가 꾸며낸 것인지 아이가 거짓말을 한 것인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나를 비롯한 아이들이 돈을 가져오라고 시켰다고 전해졌다. 다른 아이들은 받아도 3백 원, 5백 원 정도였을 텐데, 나는 몇 천 원이나 만원 가까이 됐을지도 모른다.


그날 나는 집에서 잠시 쫓겨났다. 어머니는 내가 아이에게 돈을 갈취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것이고, 아버지는 나를 잠시 쫓아냈다. 그 냉정한 느낌이 기억이 난다. 아이들에게 어두운 밤거리는 여간 친근하지 않다. 부모와 같이 있는 것이 아니라면 해지고 난 밤거리는 아이들의 장소가 아니다. 잠깐 이었지만 이후부터 나는 거짓말이나 남의 물건을 부러워하는 일을 거의 하지 못했다. 지방에서 서울로 상경해 아이의 성적이 궁금했을 부모에게 나는 그땐 몰랐던 8 학군 초등학교에서도 1,2등을 놓치지 않았었는데, 부모에게는 상당한 충격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때 성적 통지표를 보면 필기 성적은 괜찮지만 실기 성적은 점수가 좋지 않고, 성격발달사항에서 도덕성은 가나다중에 '다'를 받았다.

'죄'에 대한 강력한 두려움은 지금은 나의 인식에서 사라진 혹은 사라졌다고 생각하는 기독교의 역할이 지대하다. 서른 넘어 철학 공부를 하다가 선택적, 자기중심적 결정으로 무신론자, 불가지론자가 되었지만, 기독교의 교리는 오랜 시간 나의 삶을 지탱 혹은 침식했다. 가정 성서 6권을 반복해서 읽었고 새벽기도도 빠지지 않았다. 이수 초등학교 1학년 때는 방배동 교회 성가 경연대회에서 무슨 상을 받았었는데, 찬송가 "우리 다시 만날 때까지"를 4절까지 혼자 독창을 했기 때문이다. 나의 긴장했던 마음이 떠오른다. 고개를 숙이다가 3절쯤 관객을 바라봤는데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상품인 휴지걸이를 받고 울었던 기억이 나기도 한다. 그 방배동 교회는 아무래도 위치는 이동한 것으로 생각되고, 방배동 교회의 정치적인 문제가 생겨 교회가 둘로 갈라졌고, 그 교회는 서초 제일교회였는데, 이름이 여전히 있다. 그때 분리의 아픔과 대결을 그들은 종교 안에서 치유할 수 있었을까? 종교의 경전은 하나이지만 그 해석을 두고 종교의 구분이 생기고 같은 구분에서도 교회에서는 또 다른 이유로 갈라지며 반목을 반복한다. 현실은 신의 영역이 영향을 미친다고 개별적인 해석을 하는 인간 몸의 부딪힘이기 때문이다. 방배동 교회 건물에서 보이는 꽃동산 어린이집의 지워지지 않는 흔적은 영험하지도 깔끔하지도 않은 삶의 단면을 보여준다.


이주민은 어떻게 정의될 수 있을까, 나는 고향인 전주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고 유치원까지 있었던 군산에 갔더니 병설유치원은 있지만 살았던 곳은 그 형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재개발이 되어버렸다. 20년 전에 군대 가기 전에 홀로 여행을 다니며 찾았던 그곳의 사진이 사라진 것이 여간 아쉽지않지만, 그만큼 나는 사진을 찍지 못할 정도로 감정과 혹은 망가진 빈집을 보며 사진을 찍기 싫을 감정이 났을 것이다. 서울 방배동, 그곳의 변하거나 변하지 않은 모습을 보고, 나 또한 변했거나 남아있는 것들이 떠오르는 것을 보면 누구나 이주민이면서도 누구나 그리워하는 장소는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1987년과 1988년 그 높아 보였던 오르막길이 습한 여름날에도 몇 발자국이면 오를 수 있을 정도라면, 나를 뒤 흔들던 기억들과 아무리 털어내려 해도 사라지지 않는 각인들은 어딘가 떠나고 싶다가도 다시금 따스함이 그리워지는 복잡함을 받아들이게 한다.


p.s. 들른밥집, 아 이곳맛있다 #남현동전주식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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