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의 끝에서 다시 태어나다

- 바람이 남긴 시작의 기록 - 첫 번째





칠레 남단, 파타고니아의 바람은 낮에도 밤에도 멈추지 않는다. 공항을 벗어나자 차가운 공기가 폐 속으로 파고들었다.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하늘의 색이 다름을 느꼈다. 어디서도 본 적 없는, 투명한 파란빛이었다. 그 빛이 내 마음의 먼지를 한순간에 털어냈다. 그날, 바람 속에서 ‘다시 태어났다.’



토레스 델 파이네(Torres del Paine). 이곳의 이름은 원주민 마푸체(Mapuche) 언어로 ‘푸른색’을 뜻한다. 그들에게 푸른색은 단순한 색이 아니었다. 생명의 상징이자, 신의 숨결이었다. 하늘과 물, 영혼이 모두 같은 빛을 하고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그들은 산을 신이라 부르지 않았다. 대신 “하늘의 호흡이 내려앉은 자리”라 했다. 그 믿음은 여전히 이곳의 공기 속에 남아 있다. 오늘 그 호흡 속을 걷고 있었다.



산 아래에는 빙하가 녹아 만든 호수가 있었다. 그 이름은 페호에(Pehoé). 맑은 옥빛의 물결 위로 바람이 지나가 면파문이 번져 마치 하늘이 흔들리는 듯했다. 이 호수의 물은 약 1만 2천 년 전, 마지막 빙하기가 물러난 자리에서 태어났다. 칠레 국립환경연구소의 보고에 따르면, 페오에 호수의 미생물 구조는 지구 초기 생명체의 흔적과 유전적으로 유사하다고 한다. 과학자들은 이곳을 “지구 생명의 원형을 간직한 장소”라 부른다. 호숫가에 앉아 그 물결을 바라보았다. 지구의 심장이 천천히 뛰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그 순간, 내 안의 오래된 시간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19세기말, 유럽 탐험가들이 처음 이곳을 찾았을 때 그들은 이 풍경을 ‘신의 손길이 닿은 곳’이라 기록했다. 당시 남극을 향하던 항로 탐사대의 한 일원이었던 ‘알프레도 에르난데스’는 일기장에 이렇게 썼다. “이곳의 바람은 말이 없다. 그러나 그 침묵이 모든 생명의 언어다.” 백여 년이 지난 지금, 그가 남긴 문장을 떠올리며 같은 바람을 맞았다. 시간은 흘렀지만 바람의 결은 변하지 않았다.



파타고니아의 사람들은 자연을 ‘존재의 원점’이라 부른다. 그들에게 신앙은 교회가 아니라 하늘이고, 기도는 노래가 아니라 바람이다. 노년의 마푸체 노인은 내게 이렇게 말했다. “신은 멀리 있지 않아. 이 바람, 이 물, 이 땅이 모두 신이야.”그 말이 내 가슴에 깊이 남았다. 문명은 발전했지만, 그 단순한 신앙은 오히려 인간이 잃어버린 것처럼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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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걷다 문득 멈춰 섰다. 멀리서 흰 구름이 산을 타고 오르고 있었다. 그 모습이 마치 하늘이 숨을 쉬는 것 같았다. ‘파이네’라는 이름이 왜 ‘푸름’인지를 그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이곳에서는 모든 것이 순환한다. 바람이 지나가면 구름이 생기고, 구름이 비를 낳고, 비가 다시 호수로 돌아간다. 끝이 없다. 그 순환의 끝에 인간이 있다.



오래전 읽었던 한 구절을 떠올렸다. “인간은 자연을 정복하려 하지만, 자연은 그저 인간을 품는다.” 이곳에서는 그 말이 실감 났다. 산은 인간을 시험하지 않았다. 그저 바라보았다. 우리가 얼마나 조용히 존재할 수 있는가를.



하루가 저물 무렵, 호수의 색이 짙은 보랏빛으로 변했다. 하늘과 호수가 맞닿은 그 경계에서 모든 소리가 사라졌다. 그때 들려온 것은 내 심장의 소리뿐이었다.

그 바람이 내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 부름에 응답했다. “끝이란, 새로운 시작이 숨 쉬는 자리였다는 것을.”



그날 이후 나는 세상의 속도를 조금 늦췄다. 어딘가로 가기보다, 그 자리에 머무는 법을 배웠다. 지구의 끝에서, 다시 태어났다.





2025년 11월 13일

- 신점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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