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기원이 바람으로 남다
토레스 델 파이네의 새벽은 언제나 바람으로 시작된다. 밤새 산맥의 능선을 따라 흐르던 공기가 해가 떠오르며 색을 바꾼다. 푸른빛에서 은빛으로, 은빛에서 다시 황금빛으로. 그 바람의 결 속에서 걷고 있었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은 바람을 통해 태어나고, 또 그 바람으로 돌아간다는 사실을, 그곳에서 처음 배웠다.
페호에 호수는 오늘도 빛으로 숨을 쉰다. 바람이 일면 물결이 흔들리고, 햇살이 그 위에 부서진다. 그 잔잔한 진동이 마치 생명의 호흡 같았다. 지질학자들은 이 호수를‘빙하의 자궁’이라 부른다. 1만 2천 년 전 마지막 빙하기가 끝나며 산의 빙하가 녹아 흘러내린 자리, 그 물이 모여 호수가 되었다. 페호에의 물속에는 지구 초기의 미생물과 유사한 구조의 생명체가 살아 있다. 과학자들은 이곳의 물을 분석하며,“이 호수의 DNA는 지구 생명의 원형을 품고 있다”라고 말한다. 나는 그 문장을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바람이 생명을 남기고 간 자리에서.”
토레스 델 파이네의 바람은 단순한 공기의 움직임이 아니다. 그건 이 땅의 심장박동이다. 태초의 바람은 지구를 돌며 대지를 만들었고, 그 흔적이 지금 이 산맥과 호수 위에 남아 있다. 현지의 마푸체(Mapuche) 원주민들은 바람을 신의 목소리로 여긴다. 그들의 신화에 따르면,“인간은 흙과 바람의 결합으로 태어났다.”흙이 몸을 만들고, 바람이 영혼을 넣었다는 것이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모든 것은 바람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나의 숨도, 호수의 파도도, 심지어 먼 빙하의 균열까지도.
길을 걷다 한 무리의 과나코(guanaco, 야생 라마)가 보였다. 그들은 바람의 방향을 먼저 감지한다. 바람이 바뀌면, 그 즉시 고개를 들고 귀를 세운다. 그 감각으로 폭풍과 비를 예측한다. 생존은 곧 바람을 읽는 일이다. 그들을 바라보다가 문득 깨달았다. 인간도 본래 그런 존재였다는 것을. 언젠가 우리도 바람의 언어를 이해했을 것이다. 그러나 문명이 커질수록, 우리는 그 언어를 잃어버렸다.
해 질 무렵, 페호에 호수의 색은 하루에 몇 번이고 달라졌다. 아침의 옥빛이 오후엔 유백색으로, 저녁엔 자줏빛으로 변한다. 그 변화는 순식간이었고, 그 안에 하루의 모든 시간이 담겨 있었다. 그날 호숫가에 앉아 노트를 꺼냈다. 손끝에 바람이 닿았다. 그 바람이 내 손을 움직이는 듯했다. 글자가 아니라, 숨결이 써 내려가고 있었다. “생명은 바람이 남기고 간 흔적이다.”
1900년대 초, 유럽의 탐험가들은 이 지역을 ‘바람의 땅’이라 불렀다. 그들은 이곳에서 불어오는 거센 돌풍에 텐트와 장비를 잃기도 했지만, 돌아간 뒤엔 하나같이 이렇게 썼다. “그 바람 속에는 설명할 수 없는 생명이 있었다.” 어쩌면 그들도 나와 같은 깨달음을 얻었을 것이다. 바람은 자연의 언어이자, 우리 존재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밤이 찾아오면 별들이 바람의 길을 따라 흩어진다. 하늘의 은하수는 마치 바람이 그린 선처럼 이어진다. 그 길을 바라보다가 내 안에서도 같은 바람이 불고 있음을 느꼈다. 그 바람은 기억이었다. 누군가를 떠올리는 일, 무언가를 다시 시작하려는 마음, 그 모든 감정은 바람의 형태로 피어났다.
새벽녘, 마지막으로 호숫가에 섰다. 한 줄기 바람이 내 볼을 스쳤다. 그 바람이 어제의 나를 데려가고, 새로운 나를 남겨두고 갔다. 비로소 깨달았다. “바람이 사라진 자리마다, 생명이 피었다.” 지구의 끝에서 나는 바람이 남기고 간 숨결 속에 서 있었다.
2025년 11월 14일
- 신점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