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의 기억과 회복의 시간
토레스 델 파이네의 길을 걷다 보면 어느 순간 풍경이 바뀐다. 푸르던 초원 끝에서, 불에 탄 나무들이 검은 그림자처럼 서 있다. 그곳이 바로 ‘불의 대지’라 불리는 구간이다. 바람이 불면 타버린 가지들이 서로 부딪히며 낮게 울린다. 그 소리가 이상하게도 따뜻했다. 그건 슬픔이 아니라, 살아 있음의 신호였다.
이 숲은 세 번의 큰 화마를 겪었다. 2005년, 2011년, 그리고 2017년. 가장 큰 피해를 남긴 건 2011년이었다. 한 여행자가 버린 휴지 한 장에서 시작된 불이 3만 헥타르의 숲을 태웠다. 공원 전체 면적의 10%가 사라졌고, 칠레 정부는 이 비극을 “천국의 불지옥”이라 불렀다. 그러나 10년이 흐른 지금, 그 자리에 다시 풀이 자라고 있다. 불탄 나무의 뿌리 사이로 연초록 새싹이 고개를 든다. 자연은 스스로를 치유하는 법을 알고 있었다.
칠레 환경부와 파타고니아 보존재단은 그해 이후 대대적인 복원 사업을 시작했다. 토종 식물인 노토파구스(Nothofagus, 남미너도밤나무)의 씨앗을 모아 불탄 지역 곳곳에 뿌렸다. 그들은 ‘인간이 복원하는 숲’이 아니라 ‘자연이 스스로 살아나는 숲’을 만들고자 했다. 과학자들이 정한 규칙은 단 하나였다. “시간을 기다릴 것.” 그 결과, 10년 만에 숲은 스스로의 리듬으로 다시 피어났다. 새들이 돌아왔고, 바람이 다시 그 길을 통과하기 시작했다.
불은 모든 것을 파괴했지만, 또한 모든 것을 새롭게 했다. 나는 불탄 나무 앞에서 묘한 경건함을 느꼈다. 그 나무들은 이미 죽은 것이 아니라, 다시 살아가는 중이었다. 검은 껍질 사이로 새살이 돋고, 가지 끝에는 작은 잎들이 빛을 받았다. 그 장면은 내게 한 문장을 속삭였다. “상처는 죽음이 아니라, 새로운 탄생의 문이다.”
불탄 숲을 지나며 인간의 삶을 떠올렸다. 우리도 종종 모든 걸 잃고 나서야 무엇이 중요한지 깨닫는다. 상처가 우리를 망가뜨리는 게 아니라, 다시 살아가게 만드는 지도 모른다. 그날 숲 속에서, 자신을 용서하는 법을 배웠다. 타버린 나무들이 그 자리를 떠나지 않고 그 뿌리로 다시 살아가는 것처럼, 나 역시 내 자리에서 회복될 수 있음을 확신했다.
멀리서 한 무리의 플라밍고가 하늘을 가로질렀다. 그들의 날갯짓이 불탄 땅 위로 붉은 그림자를 만들었다. 그 붉음은 불의 색이 아니라, 생명의 색이었다. 자연은 슬픔조차 아름다움으로 바꾸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한 노년의 파크레인저가 내게 말했다. “불은 파괴가 아니라 정화야. 모든 건 다시 태어나기 위한 준비지.”그의 말이 바람처럼 지나갔다. 나는 그 문장을 오래 기억했다.
그날 저녁, 토레스 델 파이네의 하늘은 유난히 붉었다. 해가 지고 난 뒤에도 붉은 기운이 오래 남았다. 불의 기억이 하늘에 남은 듯했다. 그러나 그 붉음은 더 이상 아픔이 아니었다. 그건 회복의 빛이었다.
“모든 상처는 언젠가 새싹으로 피어난다.”
그 문장을 마음에 새기며 불탄 숲을 천천히 걸어 나왔다. 그 길의 끝에서 바람이 다시 불기 시작했다.
2025년 11월 15일
- 신점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