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의 침묵과 대지의 기억〉
지구는 지금, 아주 오래된 꿈에서 깨어나고 있다.
그 깨어남은 봄의 설렘이 아니라, 억겁의 시간이 문을 여는 소리에 가깝다. 시베리아의 영구 동토층 아래에 잠들어 있던 것들이 하나둘씩 기지개를 켜고 있다. 빙하기의 바람, 고대의 꽃가루, 잊힌 생명의 DNA…
인간의 시간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존재들이 지금, 지구의 표면 위로 돌아오고 있다.
지구는 잊지 않았다. 단지 너무 오래 기다렸을 뿐이다.
‘기억’이 녹아내리는 풍경
내가 처음 기후 강의를 시작했던 2009년, 아이들은 눈을 반짝였고 어른들은 “아직 먼 이야기”라고 말하곤 했다. 하지만 지금 시베리아의 풍경을 보면 알 수 있다. 그 미래는 이미 도착했다는 것을. 얼음 속에 잠든 생명들이 깨어나는 것은 경이이자 경고다. 지구는 자신이 겪어온 모든 시간을 다시 펼쳐 보이며 인간에게 묻고 있다.
바이칼 호수 — 시간을 품은 심장
바이칼 호수 앞에 서면 이 거대한 지구조차 ‘살아 있는 존재’라는 사실이 선명해진다.
2,500만 년 동안 지구가 품어온 기억, 수심 1,642m 아래 누워 있는 생명의 기록, 얼음 아래 미세하게 갈라지는 소리까지… 그 모든 것이 마치 지구의 심장박동처럼 들린다. 바이칼의 찬 바람은 묘하게 따뜻하다.
살아 있음의 온기, 존재의 숨결이 그 안에 있다.
침묵의 땅이 전하는 문장
시베리아는 침묵한다. 그러나 그 침묵은 죽음의 고요가 아니라 ‘시간이 견딘 자리’에서만 들리는 소리다.
나는 그 침묵 속에서 한 문장을 읽는다. 태항산의 돌결에서도, 신선거 협곡의 바람 속에서도, 그리고 바이칼의 얼음결에서도 동일하게 발견한 문장. “모든 생명은 언젠가 다시 돌아온다.” 지구는 결코 말을 잃지 않는다.
단지 그 언어를 읽을 사람이 점점 줄어들 뿐이다.
지구가 묻는 질문
지구는 여러 번의 대멸종을 견디고 다시 생명을 피워냈다. 그러니 결국 우리가 고민해야 할 것은 ‘지구가 살아남을까?’가 아니라 ‘인간이 그 순환 속에서 어떤 자리를 차지할 자격이 있는가?’이다.
나는 시베리아의 바람을 떠올릴 때마다. 스스로에게 묻는다. “너는 지금, 지구의 일부로 살고 있는가?” 바람은 대답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침묵 속에서 나는 지구가 전하는 가장 깊은 위로와 동시에 가장 큰 경고를 듣는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고 있는가?”
2025년 11월 22일
- 신점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