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대와 세대를 잇는 보이지 않는 끈
여행은 단지 장소를 옮기는 행위가 아니다. 때로는 아주 작은 장면 하나가 마음속 오래된 서랍을 열고,
그 속에 잠들어 있던 감정 하나를 천천히 깨워 올린다. 미국으로 향하는 14시간의 비행 속에서 나는 한 장의 포대기가 건넨 ‘세대의 기억’을 마주했다.
낯선 공간에 피어난 한 조각의 온기
트랜스퍼를 거친 비행은 이미 다소 지친 분위기였다. 사람들은 이어폰을 끼고 잠에 들거나, 화면 속 영화를 따라가며 시간을 견뎌내고 있었다. 그때 앞자리에서 조심스러운 움직임이 보였다. 한 젊은 엄마가 갓난아이를 포대기로 감싸 업고 있었다. 요즘에는 보기 드물어진 포대기가 비행기라는 서늘한 공기 속에서 마치 다른 시대의 숨결처럼 느껴졌다.
아이의 머리는 엄마의 어깨에 가만히 기대어 있었고, 엄마는 자세가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도록 하나의 동작마다 신중하게 무게를 조절하고 있었다. 이 작은 움직임들을 보며 ‘육아는 기술이 아니라 온도’라는 말을 떠올렸다. 세상이 아무리 빠르게 바뀌어도 아이를 재우는 엄마의 손길은 시대와 무관하게 동일한 진심을 품는다.
포대기라는 언어, 말하지 않아도 아는 마음
포대기는 단순한 천이 아니다. 그 속에는 엄마와 아이의 숨결이 얽혀 있고, 세대를 이어주는 깊은 기억이 깃들어 있다. 나 역시 한때 그 포대기를 등에 맨 엄마였다. 아이는 포대기 속에서 내 심장 박동을 들으며 잠들었고,
나는 아이를 업은 채 밥을 짓고, 글을 쓰고, 때로는 울고 웃으며 하루를 버텨냈다. 그 기억이 스르륵 되살아났다. 앞자리의 젊은 엄마가 바로 그 이어짐의 한 조각처럼 느껴졌다.
비행기라는 낯선 공간은 우리를 철저히 개인으로 만든다고 생각했지만 그 순간만큼은 달랐다. 엄마의 어깨 위에 놓인 아이의 작은 머리, 그 머리 위를 덮은 포대기 한 장이 세대와 세대를 연결하는 다리가 되고 있었다.
하늘 위에서 깨달은 ‘본질’
비행기가 밤을 건너며 흔들릴 때, 아이도 잠시 눈을 떴다가 다시 잠들었다. 엄마는 아이가 놀라지 않도록
한 손으로 등을 가만히 쓸어내렸다. 그 손끝에 ‘희생’이라는 무거운 단어가 붙어 있었음에도, 그 희생은 늘 그렇듯 조용하고 자연스러웠다. 세상의 모든 엄마들이 그러하다. 자신의 피곤함을 뒤로 미루고, 아이가 잠든 순간 비로소 작은 숨을 내쉰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동안 나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진짜 연대는 말로 설명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삶의 무게를 보았을 때, 마음이 조용히 기울어지는 순간에 생긴다. 그날, 나는 그 젊은 엄마에게서 이유 없는 연민과 깊은 존중을 동시에 느꼈다.
여행이 남기는 가장 깊은 선물
사람들은 여행을 떠날 때 새로운 풍경을 보겠다고 말한다. 하지만 정작 오래 남는 것은 그곳의 하늘도, 건물도 아닌 사람에게서 건너온 작은 마음이다. 나는 그 젊은 엄마의 이름도, 국적도 모른다. 그러나 그녀가 업고 있던 아기의 체온, 그 아기를 감싸고 있던 포대기의 결, 엄마가 무심코 토닥이던 리듬은 오래도록 잊히지 않을 것이다.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여행의 본질은 결국 ‘사람’이며, 사람을 통해 다시 나를 돌아보는 일이라는 것을.
하늘 위에서 마주한 그 작은 장면은 내 마음속에 조용한 여운을 남겼다.
세상이 어떻게 변하든 이 오래된 연대의 힘만큼은 변하지 않는다.
포대기 한 장, 어머니의 손길, 잠든 아이의 숨결. 이 모든 것이 우리가 다시 사람답게 살아가도록 이끄는
가장 단단한 ‘기억의 끈’이다.
2025년 11월 23일
- 신점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