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레키파
12월의 한국은 차갑고 선명하지만, 지구 반대편 아레키파에는 빛이 마치 숨을 고르듯 천천히 내려앉고 있었다. 이 도시는 화려함 대신, 햇살과 색채로 자신을 말하는 곳이었다.
산타 카탈리나 수도원 앞에서 첫 발을 디뎠을 때, 나는 그 풍경이 ‘공기’처럼 느껴졌다. 붉은 벽은 오래된 기억처럼 따뜻했고, 파란 벽은 마음속 물결을 잔잔히 가라앉혔다. 아레키파에서는 빛이 먼저 말을 걸고, 색이 조용히 대답을 잇는다.
수도원 안을 걸으면 사람들의 발자국보다 오래된 건물 벽에 고여 있는 빛의 결이다. 정오 무렵 붉은 벽에 매달린 밝은 햇살, 회랑을 스치는 바람이 만들어내는 얇은 흔들림, 오렌지 나무 아래 비스듬히 드리워진 그림자까지. 이곳에서는 모든 것이 하나의 장면이 된다. 사진에 담기 어렵고, 말로도 다 들려줄 수 없는, 그런 ‘잠깐의 아름다움’이 계속 피어났다.
지붕 위로 올라섰을 때, 멀리 미스티 화산이 나직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수백 년 동안 도시를 바라봤을 텐데도 그 표정은 사납지 않고 그저 묵묵했다. 말을 건네지 않지만, 그 묵언이 오히려 사람을 안심시키는 듯했다. 도시를 감싸는 조용한 온기가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깊은 위로가 되었다.
수도원을 나와 골목을 걷다 보면 어느 순간 작은 택시 한 대가 지나간다. 알록달록하게 칠해진 대우의 ‘티코’. 이국의 길모퉁이에서 만난 익숙한 이름 하나가 기묘하게 마음을 눌러주었다. 개인적인 추억도 아니었는데 왠지 오래전 나에게서 왔다가 다시 돌아가는 듯한 감정이 스쳤다. 여행은 이렇게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사람의 마음을 건드린다.
아레키파의 하루는 풍경을 보는 여행이 아니라, 풍경 속에서 나를 다시 바라보는 시간에 더 가까웠다. 붉은 벽을 타고 흐르는 부드러운 빛, 파란 벽에 잠시 머물다 가는 바람, 지붕 위에서 만난 거대한 화산의 침묵 그 모든 장면은 결국 내 안에 자리 잡은 오래된 마음들을 비추는 거울이 되었다.
도시는 말없이 많은 것을 말해준다. 그 말들을 듣기 위해서는 서둘러 걸음보다 천천히 숨을 고르는 일이 필요하다. 아레키파는 그런 도시였다. 나를 재촉하지 않고, 내 마음이 천천히 열릴 때까지 기다려주는 곳.
여행에서 돌아오는 길, 아레키파가 남긴 마지막 문장은 아주 단순했다.
빛이 머물면, 그곳에는 마음이 쉬어갈 자리가 생긴다.
2025년 11월 24일
- 신점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