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서산장에서 게르까지, 제국의 밤을 지나며
피서산장에서 게르까지, 제국의 밤을 지나며
한복 치맛자락이 바람에 스치는 소리가 열하의 물가에 잔잔히 번졌다. 열하(热河). 겨울에도 얼지 않는다는 이 강물은 황제의 여름을 지켜낸 자연의 품이자, 수백 년 동안 수많은 이방인의 발걸음을 맞이한 길목이다. 나는 그 강가에 서 있었다. 그리고 오래전 이곳에 도착했던 또 다른 여행자, 연암 박지원의 그림자를 떠올렸다. 그가 바라보았던 풍경과 오늘 내가 마주한 풍경이 한순간 겹쳐졌다. 시간은 사라지고, 공간만이 남아 조용히 나를 바라보는 듯했다.
열하의 바람은 어디에서 오는가
열하는 단순한 황궁이나 정원이 아니다. 이 도시의 공기에는 묘하게 ‘초원의 냄새’가 섞여 있다. 숲과 연못, 바위와 정자가 분명히 중국식인데도 어딘가 북방의 넓음이 스며 있다. 그 이유는 단순하다. 청더는 내몽골과 맞닿은 도시이기 때문이다. 청나라 황제들은 제국의 균형을 위해 몽골 귀족을 우대하고 그들과의 연대를 전략적 기반으로 삼았다. 그래서 열하에는 티베트식 사찰과 몽골식 지붕, 한족식 정원과 만주족 사냥터가 한 공간에 겹겹이 쌓여 있다. 이 도시가 품은 공기는 ‘다른 세계들 사이의 바람’이다. 그 바람이 이곳을 특별하게 만든다.
외팔묘와 피서산장을 걸으며
정원은 겉으로 보기에는 고요하지만 그 공간 속에는 제국의 심장이 뛰고 있었다. 황제들은 이곳에서 정사를 보았고, 몽골·티베트·중앙아시아의 사절단을 이곳으로 불러들여 제국의 통합을 보여주었다. 그렇기에 열하의 건축은 건물이 아니라 정치적 언어였다. 돌 하나, 탑 하나, 문양 하나에도 누군가를 초대하고, 달래고, 끌어안는 메시지가 새겨져 있다. 나는 그 언어를 눈으로 읽는 대신 바람으로 읽고 있었다.
연암의 시선, 그리고 나의 시선
1778년, 연암 박지원은 열하에 도착한 순간 자신이 알고 있던 ‘세계의 크기’가 처음으로 무너지는 경험을 했다. 문물이 넓었고, 사람은 다양했으며, 사상은 활기찼고, 도시는 움직이는 거대한 생명체 같았다. 그 충격이 《열하일기》가 되었고, 그 여정은 그의 사유를 확장시켰다. 나는 그의 기록을 떠올리며 걷다가 문득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지금 이 순간, 나의 세계는 얼마나 확장되고 있는가.” 여행은 기록을 남기기보다 먼저 질문을 남긴다. 열하의 풍경은 그렇게 나의 질문을 조금씩 넓혀주고 있었다.
초원의 길로 이어지다 — 게르의 밤
청더 시내를 벗어나자 풍경은 돌연 달라졌다. 산의 윤곽은 부드러워졌고, 평지는 넓게 펼쳐졌으며, 하늘은 끝없이 밀려왔다. 게르 앞에 도착했을 때 나는 마치 또 다른 나라로 이동한 것처럼 감각이 변했다. 게르의 둥근 천장은 시간의 방향을 잃게 만들고, 초원의 밤은 도시와 다른 리듬으로 호흡했다. 달빛 아래서 나는 열하에서 보았던 돌과 정자, 사찰과 호수, 비석의 글자들을 하나씩 떠올렸다. 그 모든 풍경이 초원의 바람과 하나가 되는 순간이었다. 이곳에서 나는 제국의 중심과 변방이 사실은 한 선 위에 놓여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제국의 밤이 열리는 순간 — 강희대전 공연
날이 저물고, 열하의 밤이 시작될 즈음 나는 강희대전 공연을 마주하게 되었다. 600명의 배우가 한꺼번에 등장하는 그 장면은 말 그대로 ‘제국의 스케일’ 그 자체였다. 빛, 물, 초원, 음악, 말발굽 소리가 한꺼번에 움직였고 무대 위의 인물이 아니라 역사 자체가 살아 움직이는 듯했다. 강희제가 사절을 맞이하고, 내몽골의 장군들이 도열하고, 티베트의 라마승이 의식을 올릴 때 나는 열하가 왜 이렇게 다양한 건축과 문화를 품고 있는지 한눈에 이해하게 되었다. 낮에 걸었던 피서산장과 외팔묘가 밤의 공연으로 완성되는 느낌. 여행의 마지막 퍼즐이 맞춰졌다. 제국의 밤은 그렇게 열렸다.
여행이 끝나고 남는 것
열하와 게르, 강희대전 공연까지 이어진 이 여정은 나에게 한 가지 질문을 남겼다. “우리는 어떻게 타인을 이해하는가.” 청나라는 서로 다른 민족을 하나의 제국으로 묶기 위해 이곳 열하를 ‘다문화의 무대’로 만들었다. 그 정치적 의도는 분명하지만 그 속에는 우리가 배울 만한 깊이가 있다. 타자의 문화를 존중하고, 그들의 공간을 만들고, 그들과 함께 사는 방법을 고민했던 흔적. 나는 그 길을 따라 걸으며 조금 더 넓은 시야를 가진 나로 돌아오고 있었다. 열하의 바람은 여전히 잔잔했지만 그 바람이 건네준 질문은 오랫동안 내 마음속에 남아 있을 것이다.
2025년 12월 5일
-신점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