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림(桂林)에서 만난 나만의 무릉도원

복사꽃 흐드러진 그곳에서, 나는 회귀를 경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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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연명(陶淵明)은 《도원기(桃源記)》에서 전쟁도, 세금도, 속세의 번잡함도 필요 없는 하나의 완벽한 이상향을 그려놓았습니다. 그 이야기는 수백 년 동안 동양 사상가들의 가슴속에 염원처럼 자리 잡았죠. 저는 그저 낯선 땅을 유랑하며 계림의 신비로운 산수(山水)를 지나고 있었을 뿐인데, 그 길 위에서 정말로 ‘무릉도원’을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강물을 따라 유려하게 늘어선 복숭아나무들, 그리고 그 위로 새벽의 물안개가 조용히 피어오르는 광경은 비현실적 이리만치 아름다웠습니다. 삐걱거리는 대나무 뗏목에 몸을 싣고 물길을 따라 천천히 미끄러지다 보면, 어느 순간 내가 발 딛고 있던 세상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듯한 착각에 빠져듭니다. 이곳은 단순한 여행지가 아니라, 시간이 멈춘 듯한 고요한 안식처였습니다.


도원기(桃源記) 속 장면들이 현실이 되는 곳


도연명의 글 속에서 어부는 물길을 따라가다 우연히 좁은 동굴을 발견하고, 그 너머 낯선 마을에 도착합니다. 그곳은 진(秦) 나라 시절 난을 피해 숨어든 사람들이 일구어 놓은 땅이었죠. 외부 세계와 단절되어 전쟁도 모르고, 권력 다툼도 모르고, 모두가 평온하게 서로를 도우며 살아가는 이상향.


그 상상 속의 장소가 지금의 ‘도원(桃源)’이라는 이름으로 계림 산수 한복판에 실존한다는 사실은, 어쩌면 이 혼란스러운 시대를 살아가는 여행자가 세상에서 가장 먼저 만나는 사랑일지도 모릅니다.


제가 방문한 계림의 도원은 단순히 관광객을 위한 재현된 공간이 아니었습니다. 카르스트 지형 특유의 기묘한 봉우리들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어, 마을로 들어서는 순간 외부와 차단된 '또 다른 세계'로 진입하는 느낌을 주었습니다. 소설 속 어부가 느꼈을 법한 경이로움과 낯섦이 뒤섞인 감정이 저를 압도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실제로 소박한 삶을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밭을 갈고, 누에를 치고, 전통 방식으로 물고기를 잡는 모습에서 인위적인 무대가 아닌, 대자연의 일부로서 살아가는 인간 본연의 모습을 발견했습니다. 화려하진 않지만, 그들의 얼굴에 깃든 평화로운 미소는 현대 사회에서 쉽게 찾아보기 힘든 종류의 것이었습니다.


내가 이곳에서 느낀 감정은 ‘회귀(回歸)’였다


사람들은 흔히 여행을 ‘멀리 떠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일상에서의 탈출, 새로운 경험을 향한 일탈을 추구하죠. 하지만 무릉도원은 달랐습니다. 이곳은 멀리 떠나는 곳이 아니라, 오히려 '돌아가는 곳'이었습니다.


지치고 상처받은 마음이 마침내 제자리를 찾아 돌아가는 자리. 욕망과 경쟁 속에서 한때 잃어버렸던 순수한 평온이 다시금 깨어나는 자리. 저에게 계림의 무릉도원은 그런 의미로 다가왔습니다.


도연명은 《도원기》 말미에 어부가 마을을 떠나온 후 다시 그곳을 찾으려 했으나 결국 길을 잃었다고 썼습니다. 이는 이상향이 현실에서는 쉽게 닿을 수 없는 곳임을 암시합니다. 하지만 계림의 도원은 달랐습니다. 그곳은 물리적으로 존재하는 동시에, 제 마음속 깊은 곳에 언제든 돌아갈 수 있는 심리적 좌표를 찍어주었습니다.

수많은 카르스트 봉우리들은 멀리서 보면 전부 비슷비슷해 보이지만, 그 아래 숨겨진 물길과 울창한 숲은 각기 다른 고유의 이야기를 품고 있었습니다. 굽이굽이 이어지는 강을 따라 스쳐 지나가는 풍경들은 저마다 다른 속삭임으로 저를 위로했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풍경의 절정(絶頂)에 자리한 무릉도원은 마치 오래전부터 저를 기다려온 것처럼, 조용하고 따뜻한 숨결로 저를 맞아주었습니다. 그곳에서 저는 비로소 온전한 '나' 자신으로 돌아간 느낌을 받았습니다.


현대인의 무릉도원은 어디에 있는가


계림 여행에서 돌아온 후, 저는 자주 그곳의 안개 낀 강가를 떠올립니다. 도연명이 꿈꿨던 이상향은 어쩌면 거창한 정치적 유토피아가 아니라, 그저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있는 소박한 삶의 터전이었을지도 모릅니다.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는 끊임없이 더 많은 것을 소유하고, 더 높은 곳에 오르기 위해 질주합니다. 스마트폰 너머로 쏟아지는 정보의 홍수와 끝없는 경쟁 속에서 우리는 종종 길을 잃습니다.


무릉도원은 우리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당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삶은 무엇입니까?"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반드시 계림까지 갈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저마다의 무릉도원은 각자의 마음속에 존재할 수 있습니다. 숲길을 걷는 순간일 수도 있고, 사랑하는 이와 나누는 따뜻한 대화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한 번쯤은 모든 것을 내려놓고 낯선 땅, 계림의 도원을 방문해 보는 것은 어떨까요? 복사꽃이 만개하는 계절에 그 강물 위를 떠다니며, 잃어버린 나의 평온을 되찾는 경험은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기억이 될 것입니다.




2025년 12월 4일

-신점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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