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을 앞에 두고 선 호텔
따알(Taal) 화산이 다시 깨어났다는 소식이 필리핀 전역을 흔들던 날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북쪽으로, 혹은 다른 나라로 떠날 비행 편을 찾아 분주했지만 나는 묘하게도 화산 쪽으로 마음이 끌렸다. 뉴스로 보는 분화가 아니라, 바람이 실어 나르는 먼지 냄새, 하늘을 잠시 잿빛으로 물들이는 그 ‘순간'을 내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그래서 사람들의 흐름을 거슬러 따가다이(Tagaytay) 언덕으로 올라갔다. 창밖으로는 시시때때로 바람을 타고 날아드는 화산재가 햇살에 반짝이며 떨어지고 있었다.
화산을 앞에 두고 선 호텔
따가 따이의 전망대에서 내려다보면 호수 건너편 능선 위에 크림색 외벽의 고급 호텔이 우뚝 서 있다. 원래라면 여행객들로 북적이며, 따알 화산을 바라보는 최고의 전망을 가진 호텔이었다. 그날 나는 그 호텔을 초청받아 찾았다. 초대자는 이곳의 투숙객이 아니라 호텔의 문을 자연스럽게 열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날 호텔은 고요했지만 불길한 분위기를 품고 있었다. 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로비에는 사람의 흔적이 사라지고 직원들마저 급히 대피한 뒤였다. 우리는 그 문 앞에서 잠시 멈춰 섰다. 초대자의 권한보다 자연의 한 번의 숨결이 더 큰 힘을 가진 순간이었다.
올라간 길, 내려온 길
엘리베이터가 멈춘 상태였기에 우리는 계단을 걸어 초청자의 고층 방으로 향했다. 복도는 이미 절반이 꺼진 조명 아래 어둑했고 초대자는 휴대폰 불빛을 켜서 앞을 비췄다. 낯익은 길마저 이날만큼은 어딘가 낯설고 깊게 가라앉은 느낌이었다. 방 문이 열렸을 때, 창밖으로 화산이 손에 잡힐 듯 가까이 보였다. 간헐적으로 피어오르는 연기, 호수 위로 퍼지는 미세한 흔들림, 바람이 한 번 휘돌 때마다 바뀌는 하늘의 색… 평소 같았으면 절경이라 불렀을 그 풍경은 그날만큼은 ‘경고’처럼 느껴졌다. 우리는 서로 눈을 마주쳤다. 숙박을 시도했던 마음이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내려가는 순간이었다. “아무래도 내려가는 게 좋겠습니다.” 초대자가 말했다. 그는 여기의 주인이었지만 그날만큼은 자기 방에서도 안전을 느끼지 못했다. 우리는 다시 어두운 복도를 걸어 올라온 길을 조용히 내려갔다.
여행자가 바라본 대피소의 풍경
호텔의 객실은 비어 있었지만 뒤편 체육관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집을 급히 떠나온 주민들, 비닐봉지 하나 들고 들어온 노인들, 울음을 참고 있는 아이들… 나는 여행자였지만 그 순간만큼은 ‘여행’이라는 단어가 낯설게 느껴졌다. 특별히 준비한 일정도, 예약한 방도, 초청자의 권한도 자연 앞에서는 모두 의미를 잃었다. 그 순간 나는 알았다. 삶의 위치는 언제든 한순간에 바뀔 수 있다는 것을.
따가 따이에서 내려오며
우리는 결국 그 호텔에서 하룻밤도 머물지 못하고 바탄가스로 이동했다. 창밖 풍경은 여전히 아름다웠지만 그 안에 섞인 재 냄새와 사람들의 표정은 오늘이 평범한 날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두려움보다 더 크게 밀려온 감정은 ‘인간이 자연 앞에서 얼마나 무력한가’에 대한 깊고 조용한 깨달음이었다.
문이 닫힌 자리에서 시작된 이야기
그날의 호텔은 우리에게 “여기에는 머물러서는 안 된다”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닫힌 문은, 어쩌면 다른 문이 열리기 위한 하나의 신호였는지도 모른다. 다음 날, 우리는 또 하나의 다른 세계—초대받은 사람만 들어갈 수 있는 필리핀 상위 1%의 바다, Punta Fuego로 향하게 된다. 그곳의 바다는 따가 따이에서 보고 내려온 화산의 밤과 전혀 다른 표정을 하고 있었다.
〈2부 예고〉
화산재의 밤을 지나, 우리에게 열린 또 하나의 문—Punta Fuego 이야기.
2025년 12월 12일
- 신점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