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한 문장의 핵심, 금산령
거대한 문장의 핵심 단어, 금산령
만리장성을 걷다 보면 늘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사람의 손으로 어떻게 이런 거대한 구조물을 산맥 위에 올려놓을 수 있었을까. 일직선으로 뻗지 못하고, 능선을 따라 굽이굽이 이어지는 그 길은 마치 지구의 척추를 따라 흐르는 거대한 문장처럼 느껴졌다. 그 문장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내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지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각자의 발걸음으로 그 문장의 일부를 더듬으며 수백 년 동안 이어진 시간의 숨결을 어렴풋이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그 모든 장성 중에서도, 금산령(金山嶺)은 그 문장의 핵심 단어처럼, 유난히 빛을 머금은 장소다.
사람을 살리기 위한 건축가의 진심
금산령에 도착하자마자 시선이 머문 것은 성벽보다 먼저, 한 돌덩이에 새겨진 붉은 글씨였다. “戚继光 1528–1588.” 단지 이름과 생몰년이 적혀 있을 뿐인데, 그 글자들은 묵직한 이야기를 품고 서 있었다.
척계광(戚繼光). 명나라가 가장 혼란스러웠던 시대, 그 시대를 버텨낸 장군. 왜구의 침략이 이어지던 동남 연해에서, 북방의 긴장이 끊이지 않던 변경까지, 그는 끝없이 흔들리는 나라의 경계에서 사람들의 삶을 지켜내기 위해 전장을 누볐다.
그가 설계한 금산령 장성은 단순히 방어 구조물이 아니라 ‘사람을 살리기 위한 건축’이었다. 사선으로 뚫린 총안(銃眼), 성벽 뒤에 몸을 숨길 수 있도록 계산된 각도, 둘 중 하나가 무너져도 방어가 가능한 이층 구조의 치대(敵臺). 그는 전쟁의 기술보다 전쟁 속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인간의 현실을 더 깊이 보았다.
나는 그 구조물 앞에 서서 오래도록 그를 떠올렸다. 돌 하나, 창구멍 하나까지 “사람이 살아남을 가능성”을 계산하려 했던 그의 진심. 그 마음이 바람처럼 성벽에 스며 있어 오랜 세월이 흘렀음에도 사라지지 않은 듯했다.
성벽으로 오르는 계단은 생각보다 가팔랐다. 한 계단 한 계단을 디딜 때마다 병사들의 거친 호흡이 귓가에 겹쳐 들리는 듯했다. 그들도 분명 나처럼 중간에 숨이 차올라 잠시 멈춰 하늘을 올려다본 적이 있었을 것이다. 아마도 별빛 아래에서 두려움을 삼키고, 동틀 무렵엔 다시 용기를 되새기며 한 걸음을 내디뎠을 것이다.
돌로 쌓여 있지만, 이 장성은 결코 차갑지 않다. 인간의 체온을, 인간의 희망을, 그리고 인간이 버텨온 시간의 무게를 고스란히 품고 있다. 장성을 걷는 것은 결국 ‘그 길을 먼저 걸었던 사람들’의 마음을 듣는 일이다.
고요 속에 축적된 삶의 능선
금산령은 특히 저녁이 되면 아름다움이 극에 달한다. 해가 산 뒤로 기울며 성벽을 금빛으로 물들이는 순간, 장성은 하나의 거대한 생명체처럼 숨을 쉬기 시작한다. 빛은 성벽 위를 천천히 스치며 오래된 돌의 질감을 드러내고, 그 돌들은 다시 빛을 반사해 능선 위로 힘찬 선율을 만든다.
나는 그 장면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었다. 바람이 불어오고, 멀리 겹겹이 겹친 산맥 위로 하루가 서서히 내려앉고 있었다. 그 풍경이 너무도 고요해서 순간적으로 시간의 흐름이 멈춘 것 같았다.
그러나 곧 깨달았다. 이 고요는 멈춤이 아니라 축적이라는 것을. 수백 년 동안 켜켜이 쌓여온 삶의 숨결이 한순간에 빛으로 드러난 것뿐이라는 것을. 사람들이 지나가고, 전쟁이 지나가고, 왕조가 바뀌고, 시대가 사라져도 이 성벽은 묵묵히 제자리를 지키며 시간을 견뎌왔다.
돌아오는 길에 장성 아래를 다시 내려다보았다. 그곳에는 여전히 수많은 이야기가 남아 있는 듯했다. 전쟁의 긴장, 병사들의 희비, 가족을 떠올리며 눈물로 적신 밤들, 그리고 다시 내일을 버티기 위해 일어난 새벽들. 장성은 그 모든 감정들을 돌 속에 품은 채 아무 말 없이 오늘까지 살아남아 있었다.
나는 문득 생각했다. 우리의 삶 또한 어쩌면 이 장성과 크게 다르지 않을지 모른다. 가파른 오르막을 견디고, 숨이 차오르는 순간에도 다시 한 계단을 내딛고, 어둠 속에서도 방향을 잃지 않기 위해 작은 빛 하나를 붙들고 버텨온 날들이 있었다.
그리고 언젠가 뒤돌아보면, 그 모든 길들이 하나의 장성처럼 이어져 나만의 능선을 이루고 있는 모습을 발견하게 되지 않을까. 금산령에서 내려오며 나는 내 삶의 성루가 어디까지 이어져 있을지 처음으로 궁금해졌다.
그리고 아주 작은 희망을 품었다. 지금 이 순간의 걸음도 언젠가 누군가에게 ‘빛나는 한 조각’이 될 수 있기를.
금산령은 그런 생각을 하게 만드는 곳이다. 역사의 돌 위에서 나의 시간과 마주하게 되는 자리. 과거의 숨이 오늘의 나를 건드리고, 오늘의 내가 미래로 이어질 시간을 꿈꾸게 만드는 자리.
멀리서 보면 그저 굽이진 장성이지만, 가까이서 걸어보면 그 안에 사람이 있고, 마음이 있고, 시간이 있다. 나는 그날, 장성 위에서 시간을 건너온 사람들의 숨을 들었다. 그리고 조용히 내 숨도 그 돌 사이에 맡겨두고 돌아왔다.
2025년 12월 11일
- 신점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