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자는 언제나 말이 없다
나는 한국의 전통한복을 입고 여행을 한다.
여행을 하다 보면 몸보다 먼저 마음이 흔들리는 순간들이 있다. 그럴 때 나는 모자를 쓴다. 햇볕을 가리기 위해서도, 추위를 막기 위해서도 아니다. 모자는 내가 세상과 거리를 조절하는 가장 오래된 방식이다.
어느 날 사진을 정리하다 문득 깨달았다. 나는 참 많은 모자를 쓰고 길을 걸어왔구나. 색도, 모양도, 쓰인 장소도 모두 달랐지만 그 모자들은 하나같이 같은 일을 하고 있었다. 그날의 나를 보호하고 있었다.
모자는 언제나 말이 없다. 하지만 여행 중 만난 모자들은 그 지역의 공기와 사람들의 태도를 고스란히 품고 있다. 전통 모자에는 오랜 시간 쌓인 기도가 있고, 산길에서 쓴 모자에는 바람의 방향이 남아 있다.
모자를 쓰면 시선이 달라진다. 사람을 바라보는 높이가 낮아지고 풍경을 대하는 속도가 느려진다. 그래서 모자를 쓰고 걷는 길에서는 불필요한 말이 줄어든다.
어떤 날의 모자는 나를 씩씩하게 만들었고, 어떤 날의 모자는 나를 조용하게 만들었다. 모자 하나로 사람이 바뀌는 것이 아니라 그날의 내가 선택한 태도가 우연히 모자의 형태를 빌려 남았을 뿐이다.
여행지에서 전통 모자를 쓸 때면 나는 늘 잠시 숨을 고른다. 그 모자는 장식이 아니라 그 땅 사람들이 오랜 세월 지켜온 삶의 방식이기 때문이다. 그 모자를 쓰는 순간, 나는 관광객이 아니라 잠시 그 문화 안에 머무는 사람이 된다.
여행이 끝난 뒤에도 모자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옷장 한쪽에 걸린 모자 하나가 어느 날 불쑥 나를 다시 길 위로 데려간다. 그날의 하늘, 그날의 바람, 그리고 그날의 나까지 함께.
아마 나는 앞으로도 계속 모자를 쓰고 여행할 것이다. 모자를 쓴다는 것은 세상을 조금 더 조심스럽게, 조금 더 깊게 바라보겠다는 약속이기 때문이다.
2026년 1월 16일
-신점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