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시 대협곡, 자연이 허락해야 만날 수 있는 비경

동양의 그랜드캐니언, 후베이 성 은시 대협곡을 여러 번 오르며


중국 후베이 성(호북성)의 깊은 곳, '동양의 그랜드캐니언'이라 불리는 은시 대협곡(恩施大峡谷) 앞에 설 때마다 나는 매번 다른 자연의 얼굴을 마주한다.


총길이 108km, 면적 300㎢에 달하는 이 거대한 협곡은 인간의 시간을 비웃듯 웅장하게 서 있다. 칠성채의 아찔한 절벽과 운룡지봉의 깊은 땅의 상처는 언제 보아도 경이롭지만, 이 풍경을 온전히 내어주는 일은 드물다. 나는 다행히 여러 차례 이곳을 찾으며 맑은 날의 위용과 흐린 날의 운무를 모두 목격할 수 있었지만, 그 과정이 늘 순탄했던 것만은 아니다.



사람들은 흔히 산 위는 서늘할 것이라 짐작한다. 하지만 한여름의 은시 대협곡은 그 상식을 가볍게 배반한다. 실제로 여름에 올랐을 때, 기온은 무려 40도까지 치솟았다. 깎아지른 절벽 잔도를 걷는데 숨이 턱까지 차올라 현기증이 일 정도였다. 작열하는 태양 아래서 마주한 대협곡은 아름다움을 넘어선 어떤 두려움마저 느끼게 했다.



반대로 우기의 협곡은 '보여주지 않음'으로써 존재를 과시한다. 비가 잦은 이곳의 날씨는 변덕스럽기 그지없다. 평생에 한 번, 큰 마음을 먹고 찾아온 여행자들에게 야속하게도 협곡은 종종 자신의 모습을 짙은 안개 뒤로 감춰버린다. 바로 코앞에 150m 높이의 거대한 촛대 바위, '일주향(一炷香)'이 서 있음에도 짙은 곰탕 같은 안갯속에 갇혀 아무것도 보지 못한 채 발길을 돌려야 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여행자에게는 '운'이 필요하다. 누군가는 맑게 갠 하늘 아래, 488m 길이의 절벽 잔도를 걸으며 발아래 펼쳐지는 카르스트 지형의 파노라마를 가슴에 담는다. 또 누군가는 갑자기 쏟아지는 비를 피하며, 운무 사이로 언뜻언뜻 비치는 기암괴석의 신비로운 실루엣에 만족해야 한다.



하지만 나는 생각한다. 맑으면 맑은 대로, 흐리면 흐린 대로 그 모든 것이 은시 대협곡이라고. 바람에 쓰러질 듯 위태롭게 서 있는 일주향이 수천 년을 버틴 것처럼, 땅이 찢어진 듯한 운룡지봉의 지하 협곡이 그 깊이를 간직한 것처럼, 이곳은 인간의 사정과는 무관하게 그저 그곳에 존재할 뿐이다.



혹시 이곳을 찾는다면, 날씨가 좋기를 간절히 바라되 어떤 풍경을 만나더라도 실망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40도의 열기 속에 드러난 맹렬한 기세도,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안갯속의 침묵도, 모두 대자연이 우리에게 건네는 이야기일 테니 말이다.



은시 대협곡은 단순히 눈으로 보는 관광지가 아니다. 변덕스러운 날씨와 거친 숨소리 속에서, 비로소 자연 앞에 겸허해지는 법을 배우는 곳이다.




2026년 1월 20일

-신점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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