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악마는 존재한다.'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매 순간 선과 악의 보이지 않는 줄다리기 속에 놓여있고, 이것을 늘 인지하는 것이 어쩌면 깨어있는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아침부터 엄마가 냉장고에 쌓아둔 식재료들 생각에
머릿속이 뜨겁다.
나는 좀 비웠으면 좋겠는데, 엄마는 쟁여두신다.
할인할 때, 좋은 거 나올 때 그리고 그냥 비축도 하신다.
없으면 없는 대로 먹고, 조금 덜 먹고, 안 먹을 수도 있는데.
그러다가 문득 생각한다.
' 나나 잘하지, 이런 생각들을 할 때 내가 해야 할 일들과
중요한 일들에 대한 생각에서 멀어지게 돼.'
주변사람들이 완벽하기를 바라는 내가 이상한 거다.
초점이 내가 아닌, 상대방의 행동에 맞춰져 있는 것도 잘못된 것이다. 그러나 분별은 해야 한다고 어느 신부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리고 상대방의 부족한 점을 보았을 때, 그것은 우리가 비난할 일이 아니라 기도해주어야 할 일이라고.
내가 상대방의 단점을 생각하다 보면, 어느샌가 대화 중에 그것에 대한 불평을 이야기하게 되고
이것은 관계 안에 분열과 다툼을 일으키게 되는데,
이게 바로 악마가 원하는 것이다.
우리가 서로 다툴 때 악마는 옆에서 비열하게 웃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오늘 아침 악마의 존재를 눈치채도록 도와주신 수호천사께 감사드린다.
나도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물건을 쟁여두었기에, 옷방 문을 열면 종종 한숨이 나오곤 한다.
이런 내가, 그리고 부족한 점을 열거하자면 줄줄이 나올 법한 내가, 나를 위해 음식을 장만해 주신 엄마께 불평하다니.
불평 속에, 판단 속에, 중독 속에, 집착 속에 붙들려 있는 것이 자유가 없는 것이다.
꼭 이걸 해야 하고, 저곳을 가야 하고, 그것을 먹어야 하고 사야 하는 것. 그런 것에 얽매여 진정 중요한 가치들을 볼 수 없는 것.
이것이 묶여있는 것이며 속박된 것이다.
모든 사람들 안에 오류가 있다.('하느님이시요, 사람이신 그리스도의 시'라는 책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던 내용이다.) 그 오류에 갇혀 있는 것도 자유롭지 못한 것이다.
썩어 없어질 육체에 집착하는 것 또한 마찬가지라고 말씀하셨다.
진정 자유로우면 높이 날 수 있고
사랑과 진리에 닿게 될 것이다.
수도원이라는 작은 공간 안에 갇혀있어도,
지극히 넓은 신과 소통하는 수도사들은 자유롭다.
넓은 바다와 산을 마음대로 돌아다닌다 해도
오류 안에 갇혀 있는 자는, 속박된 것이다.
오늘은 안나의 집에 가는 날이다.
매주 김하종 신부님을 뵐 수 있는 건 정말 큰 은총이다.
동생네 가족을 위한 미사예물을 핑계로 신부님께 작은 봉투를 준비했다.
엄마도 봉헌하라면서 갈취(?)했는데, 실은 엄마께서
흔쾌히 헌금을 주셨다.
신부님께 동생네 가족을 위한 기도를 부탁드렸다.
신부님께 무언가를 드리는 것은 확실하게 신께 드리는 것이라 무척이나 신난다.
허나, 이 작은 것으로 마치 내가 무언가 좋은 일을 한 것처럼 생각하게 만드는 것도, 교만으로 이끄는 악의 속임수다.
너무 과하지 않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지만,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악마는 결코 뿔 달린 모습으로 우리에게 나타나지 않는다.'라고 하셨다.
그리고 작은 것으로부터 시작해 '네가 잘했어, 칭찬받아야 해.'라고 속삭인다.
그리고 그 속삭임은 점점 더 커진다.
속삭임은 내가 높아지기를 원하라고 말한다.
신께 받은 것의 일부를 드리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되돌려 드릴 수 있다는 작은 기쁨으로 끝내고 싶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라고 말하라고 성경에 쓰여있다.
신부님께 바쁘신데 일일이 문자 안 주셔도 된다고 말씀드렸는데, 문자를 주셨다.
신부님께 아주 적은 걸 드리고서는
큰 것을 받고 싶어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오늘 하루 마음속에 걸림이 없는 하루였나 되돌아보며.
저물어 가는 해를 바라보며 작은 감사라도 드릴 수 있다면, 잠자리에 누워 편안히 잠들 수 있다면.
그리고 이글거리며 타오르고 있는 지구의 끝을 바라보며,
물질만을 긁어모으지 않고,
생의 끝을 생각해도 안심할 수 있다면
참으로 자유롭다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