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1학년때까지 작은 마당이 있는 집에 살았다.
마당에는 다롱이라는 강아지가 있었다.
사료라는 개념이 별로 없던 시절, 입맛이 까다로웠던 다롱이는 소시지만 먹었다. 작고 마른 강아지 다롱이.
나는 딱 한번 다롱이를 때리고 혼냈다. 초등학교 입학 후인지 전인지 기억은 나질 않는다.
빗자루를 들고 다롱이를 혼내면서 때렸던 기억이 있다. 이유는 없었다.
왜 그랬을까 지금 생각해 보면 내가 부모님께 혼났던 것을 단순히 흉내 냈는지,
어디서 보고 배운 것을 약자라는 강아지에게 무심코 행했는지 나도 잘 모른다.
실내에서 키워야 할 것 같은 소형견이었는데, 초등학교 2학년 시절 아파트로 이사 오면서 다롱이는 살던 집에 남겨두게 되었다.
어린 나는 다롱이를 데려갈 수 없는 거냐고 부모님께 여쭤봤지만, 안된다고 하셨다.
아파트와 예전에 살던 집이 그리 멀지 않았고, 얼마 후 나는 다롱이를 보러 가자고 엄마를 졸랐다.
그런데 다롱이가 없었다. 며칠 후 또 가봤지만 다롱이는 여전히 없었다.
1~2년이 지났을까? 하교 중에 다롱이와 비슷한 강아지를 발견하고 숨이 턱끝까지 차오르도록 쫓아 갔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그 강아지는 계속 도망을 갔고 나는 그 강아지가 다롱이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개는 주인을 평생 잊지 않는데 그 멍멍이는 다른 강아지였다.
우리 다롱이는 어떻게 됐을까...
그저 미안하다. 때렸던 것도 미안하고, 내가 어려서 이사 갈 때 데려가지 못했던 것도 너무 미안하다.
그 후 초등학생 때, 아빠 친구분들 가족들과 여행을 간 적이 있었다.
한 가족이 강아지를 데리고 왔었는데, 그때부터 부모님께 강아지를 키우자며 졸라대기 시작했다.
동생이 아토피 피부염이 있어서, 부모님께서는 절대 안 된다고 하셨지만 나는 틈만 나면 졸라댔다.
엄마는 내가 계속 졸라대니까 동생이 피부과 진료를 받는 날에 나를 데리고 진료실에 들어가서 의사 선생님께 물으셨다.
" 선생님 얘가, 강아지를 계속 키우자는데요~?"
의사 선생님은 당연히 안된다고 하셨고, 나는 그날 거의 진료실에 드러누워 울었던 것 같다.
그리고 초등학교 고학년 때. 받은 세뱃돈으로 학교 주변에서 강아지를 사 왔다.
아기 강아지는 데려오자마자 아프기 시작하더니 며칠 만에 하늘나라로 갔다.
가게 주인분께 강아지가 죽었다고 하자, 다른 강아지를 주셨는데 그 강아지도 일주일이 안되어 죽었다.
나는 강아지가 죽는 것에 충격을 받았고, 부모님은 결국 지인분의 집에서 태어난 새끼 강아지를 데리고 오셨다. '예'자 돌림으로 이름은 예삐였다.
나는 예삐를 옥이야 금이야 돌봤는데, 내 베개 위에 눕히고 내 이불을 덮어 주었으며 내 침대는 예삐의 침대가 되었다. 나는 예삐가 편하게 자는 옆에 쭈그리고 잠을 잤다.
강아지를 어떻게 키워야 되는지 전혀 몰랐던 나는 예삐를 '주인을 무는 강아지'로 키웠다.
서열 1위였던 예삐는, 우리 가족 중에 누군가를 심하게 물었고, 아주 심하게 혼났고 열 살 즈음 스트레스로 하늘나라로 갔다.
세 번째 강아지는 예삐가 떠난 지 몇 년 후, 대학교 재학 중 전공이 적성에 맞지 않아 우울하던 시절이었다.
유기견 보호소에서 작고 조용한 강아지를 데려왔고, 봄이었기에 '예봄'이란 이름을 지어주었다.
그리고 얼마 안 되어 갈곳 없어진 네 번째 아기 강아지 '구단'이가 오게 되어 예봄이와 구단이를 동시에 키웠다.
나는 구단이보다 예봄이를 더 예뻐했다.
내가 먼저 예뻐한 예봄이가 구단이를 좋아하지 않아서, 덩달아 구단이를 충분히 예뼈하고 사랑해주지 못했다.
예봄이는 9살에 신장병으로, 구단이는 8살에 녹내장으로 힘들어하다가 같은 해 3월과 5월에 각각 하늘나라로 떠났다. 한참 예봄이와 구단이를 키울 때 나는 남자친구들과 놀러 다니느라 집에 있는 시간이 적었고,
엄마는 나 대신 개 육아에 충실하시면서도 힘들어하셨다.
당시의 나는 내 삶에 정신이 팔려있어 예봄이와 구단이는 뒷전인 날들이 대부분이었지만,
마지막에 아이들이 많이 아팠기 때문에 참 힘들었던 기억이 난다.
다섯 번째 멍멍이는 작년에 보냈던 파파였다.
(파파 이야기는 다른 글들에서 많이 이야기했으므로 여기서는 하지 않겠다.)
나이에 비해 늦게 철들고, 나와 삶에 대해 많이 몰랐던 나는
파파를 보내고 난 지금에야 뭔가를 조금은 알게 된 것 같은데,
그래서 파파에게 너무 미안하다. 그저 미안하고 또 미안하다.
이렇게 부족한 나를 만나서 미안하고, 더 사랑해주지 못해서 미안하고, 파파의 마자막 몇 년에는 내 마음이 많이 힘들었기 때문에 좋은 에너지를 주지 못해서 미안하다.
파파도 마지막에 많이 아팠기 때문에, 나는 한동안 강아지를 키울 생각이 전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요즘 나는 유기견들을 구조하는 영상, 가여운 아이들이 있는 보호소의 영상 같은 것들을 거의 매일 본다. 지금 카울 자신은 없는데, 한 마리라도 데려오고 싶은 마음도 크다.
이렇게 나는 사랑이 부족하고, 많은 것들이 부족한데 왜 그렇게 강아지를 키우고 싶을까 생각한다.
강아지에게 뭘 바라서가 아니라 그저 사랑해주고 싶어서이다.
자식을 낳는 것도 마찬가지 아닐까?
그냥 사랑을 주고 싶어서.
그래서, 신께서 인간을 창조하셨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사랑 그 자체이신 신은, 그저 그 큰 사랑을 주시려고 인간을 만드신 것이다.
그 큰 사랑을 느끼고 알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