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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식주의자가 되려고 했었다.
불교적 관점에서 보면, 나는 전생에 아무 죄도 짓지 않고 도리어 남에게 베풀기만 해서 아주 운 좋게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다. 반면에 남에게 해를 끼치고 피해를 준 자들은 벌레로 태어났을 테고. 그렇다면 가축들은 무얼까.
소건 돼지 건 많이 불쌍했다. 먹으면서도 내가 혹시 죄를 짓는 것은 아닌가 생각했다.
며칠 고민하다가 그냥 포기했다. 이유는 딱 두 개였는데 첫째, 내가 고기를 소비하지 않는다고 다른 사람들이 소비를 안 하는 것도 아니며 내가 그들에게 가치관을 강요할 권리도 당연히 없다.
둘째, 고기는 포기하기에 너무 맛있다.
이렇게였다.
생명, 동물들은 대부분 귀엽다. 어느 한 연구에 따르면 모든 포유류들은 종이 다르더라도 다른 포유류의 새끼를 예뻐하고 기르려고 하기까지 한다는 연구결과가 있었다. 동물들은 참 순수하다. 때 묻지 않았다.
강아지들은 물론 거북이와 장수풍뎅이, 사슴벌레 햄스터까지 많은 동물을 길렀었는데, 학교만 다녀오면 그 앞에 앉아 동물들을 관찰했던 순간들이 간혹 생각날 때가 있다.
나는 내가 길렀던 사랑했던 동물들이 내가 죽으면 날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믿는다. 예쁜이와 덕구 그리고 지금 기르는 아이들까지 모두, 언젠가 다 한 곳에서 만났으면 좋겠다. 생명은 어느 순간에나 순결하다.
무엇보다 내가 동물들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고 생각한 일이 있다.
유치원을 갓 졸업한 나는 봄인지 여름인지 날 더운 어느 날에 외삼촌 손을 잡고 어디론가 갔다.
너무 오래되어서 왜 그런 시골에 갔는지 남자 어른들만 그곳에 있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이모도 외숙모도 엄마도 없이 난 외삼촌과 할아버지, 이모부와 호칭을 모르는 아저씨들과 트럭을 타고 시골을 갔다.
삼촌 무릎에 앉아서 본 트럭의 조수석은 놀이기구 맨 앞자리만큼 신이 났다. 내가 꼭 트럭을 운전하는 것 같았다. 나는 놀러 가는 줄 알았다.
도착한 곳은 말똥 냄새가 온누리에 퍼져있는 어느 시골이었다. 스케치북에 초록색으로 칠하고 남은 부분은 노란색으로 칠해서 초록 부분은 산이고 노란 부분은 논밭이나 농장이라고 하면 나는 그때 풍경을 정확히 묘사한 그림이라고 할 것이다.
내리자마자 어른들끼리 악수를 하고, 어느 울타리로 향했다. 멀리서부터 시끄러웠던 그곳은 돼지 농장이었다.
돼지를 기르시는 그분은 비장하게 울타리 문을 열고 옆으로 누워있는 돼지에게 다가갔다. 아마 그 돼지가 가장 몸집이 컸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부터의 일은 내가 기억한 사실을 나중에 커서 되짚은 후에 정리한 것이다. 어렸을 때는 영문도 모른 채 그냥 낯설고 무섭기만 했다.
그 돼지는 임신한 암퇘지로, 새끼들이 잘 분만되지 않아 인간의 힘이 필요한 상태였다. 돼지는 골반 입구의 직경이 새끼보다 두 배 이상 커서 분만이 쉬운 편이라 이런 상황은 드물다고 했다. 한데 그분은 돼지의 자궁에 손을 넣어 새끼들을 꺼내고 있었다. 가만 보니 옆에 있는 물체들이 볏짚이나 그런 게 아니라 죽은 돼지 새끼들이었다. 낙태처럼 저 태아들도 산모의 몸에 남아있으면 건강에 문제가 있었나 보다.
그런 충격적인 장면을 어린아이에게 아무 거리낌 없이 보여주는 아저씨들이란 지금 생각해보면 좀 잔인하다. 다른 여자 어른들이 계셨으면 눈을 가려주시고 딴 데로 피했을 건데, 그러지 않아서 난 그 광경을 기어이 지켜보고 말았다.
자궁 주변과 기다란 장갑에 무언가를 덧씌운 농부의 손은 피 칠갑이 되어있었다. 양수와 분비액으로 점철된 돼지의 몸과 축사는 한눈에 봐도 미끄덩거렸고 나는 생전 처음 보는, 앞으로 못 볼지도 모르는 경치를 가까이서도 구경하고 있었다.
제아무리 다른 종이라 할지라도 수컷들의 앞에서 한껏 다리를 벌리고 질을 넘어 자궁을 내어주는 암컷의 심정은 어떠할까. 하물여 새끼들은 옆에 차갑게 식어가고 있는데. 참담하지만 농부는 한 마리라도 살리려는 건지 계속해서 돼지의 몸에 손질을 해댔다. 돼지는 통증이 심한지 간헐적으로 다리를 움츠렸다가 폈다가 떠는 것이 참 딱했다.
돼지 새끼들은 내 손바닥보다 조금 컸다. 내 손바닥이 6개 정도 있으면 삼촌 손이랑 비슷하니까 저 안에 내 손만 한 게 7~8개 정도 있었고 아직 몇 개 더 있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몇 마리 건진 건지 돼지는 남은 숨을 헐떡이며 몸을 반대 방향으로 뉘었고, 아직 살아있는 새끼들은 아저씨들이 니퍼로 앞니를 뽑았다. 그렇지 않으면 새끼들이 젖을 빨 때 모돈의 젖에 상처를 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세상에 난지 1분도 안되어 언청이 비스름한 삶을 살다니, 저들도 크면 결국엔 고깃덩이가 될 것이 뻔했다.
앞뒤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잘 기억도 나지 않지만 충격 때문인지 생생히 이 일을 기억한다. 생명의 탄생. 다른 이의 힘을 빌리는 생명의 탄생. 그 옆에선 몇몇 생명이 이미 죽어가고 있고, 허물없는 가축의 몸은 너무 해부학적이어서 잘 각인이 되었다.
돼지는 사실 똑똑한 동물이다. 많은 영화감독들은 동물들을 촬영에 쓸 때 돼지들이 가장 영리해서 NG 없이 찍기 쉽다고 말했다. 또한 개들을 한 울타리에 풀어놓으면 여기저기 변을 싸지른다. 그마저도 자기들끼리 더러워하며 잘 움직이지도 않고 서로 크르릉대며 난장판을 만든다. 각자 이곳이 화장실이라고 판단한 근거가 다르다는 얘기다. 하지만 돼지들은 한 놈이 어느 곳에 싸면 모든 돼지가 그곳을 화장실로 규정하고 볼일을 볼 때가 아니면 그곳에 가지도 않는다. 위생적 문화로만 본다면 돼지가 개보다 우등한 것이다.
나는 어미 돼지의 허탈하면서도 고통에 몸부림을 치다 지쳐버린 눈빛을 아직 기억한다. 그 눈망울은 무엇이었을까. 핑크빛이 도는 귀는 상기된 채 붉을 지경이었고, 외음부 주변은 피가 흐르다 못해 굳었는지 보라색 빛이 되어있었다. 자극적이고 참혹하다.
돼지든 소든 그 무엇이 됐든 인간에 필요해 의해 길러지는 동물들, 사냥되고 살해당하는 동물들에 대해서 생각했다. 마냥 동물들이 좋아서 사진집을 사달라고 떼쓴 나의 모습과 당당히 수의사라고 써놓은 어렸을 적에 장래희망 조사지가 휘몰아치듯 오버랩됐다. 생명은 소중하다. 나는 갑자기 엄마가 해준 비엔나소시지가 역겹게 느껴졌다. 같은 맛인데도 쇠를 씹고 피를 들이켜는 맛이었다. 그날 나는 처음으로 밥을 남겨 엄마한테 혼났다. 9살 때 일이었다.
조금 머리가 커진 뒤에 다시 곰곰이 생각했다. 고기를 안 먹고 살 수는 없다. 나는 무분별하게 생명을 학살하지도 않고, 오히려 동물들을 아껴주고 좋아한다. 생명은 귀하다. 그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불사의 명제이다. 고기를 먹는 등 인간의 어떠한 이익으로 다른 생명을 소비할 때는, 감사한 마음을 가지기로 했다. 스님들이 고기를 먹지 않는 이유가 그제야 이해가 됐다. 놀이터에서 개미를 밟는 일도 그만두었다. 매미나 잠자리를 잡고 여자애들을 놀리는 것도 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들만의 생애가 있고 모기 같은 해충이 아닌 한 그들은 내 생활 영역을 대부분 침범하지 않으며 내게 이렇다 할 해도 끼치지 않는다. 내게도 그들의 권리를 박탈할 기회는 없는 것이다. 최재천 교수의 생명이 있는 것은 다 아름답다는 책이 고등학교 1학년 때 필독서로 올라왔다. 알면 사랑하게 된다는 그의 말이 맴돌았다. 살아있다면 아름답다, 생명이라면 사랑하자.
그래서 나는, 자살하지 않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