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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음 안 좋으신 분 있나요?

가갸거겨고교구규

by 목여름

내가 내 발음이 좋지 않다고 느낀 것은 중학교 2학년 때다.

무언가 웃긴 분위기 속에서 재잘재잘 말을 하고 있었다. 학원이었고, 친구들 네댓 명이 있었다. 국어를 가르치던 선생님은 약간 심란한 표정으로 나와 눈을 마주쳤다가 내 말이 다 끝나자 심각한 어투로 말했다.


"미안한데 네가 뭐라는지 하나도 못 알아듣겠어"


나는 아나운서도 꿈꿔볼 만큼 말하는 것에는 나름 자신이 있었다. 글에 자신 있으니 당연히 말도 잘한다고 생각했다. 근데 그건 그냥 내 생각이었다. 항상 친절하시던 선생님이 정색도 아닌 무표정으로 그런 말씀을 하시니 난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내가 잠깐 급해서 말을 빨리 해서 그런가? 엄마를 닮아 뭐든 빨리 하려는 성격이, 애들을 재밌게 해주고 있다는 그 흥분감이 표출되어서 발음이 이상해 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완전히 틀린 생각이었다.


나는 점점 커 가면서 내가 말을 할 때 발음을 잘 뭉갠다는 것을 알았다.


받침으로 오지 않는 `ㅇ`과 `ㄹ`받침을 할 때 심했다. 사춘기라서 그런지 몰라도, 발음이 뭉개지는 내 혀가 나까지 뭉개는 것 같았다. 나 자신이 미웠다. 고치려고 해도 잘 고쳐지지 않았다.


중3 때 즈음부터는 아예 말을 아끼기 시작했다. 원래도 그렇게 말을 많이 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더 아꼈다.


그러다 나와 비슷한 친구를 발견했다. 중학교 때 자폐아인 친구였는데, 그 친구도 발음이 이상했다. 다른 애들은 그 애를 가지고 놀리거나 장난을 쳤지만, 난 그러지 않았다. 그게 동질감 때문인지 선인지 난 아직 모르겠다.


그 외에도 발음이 이상한 친구들을 여럿 봤다. 난 그럴 때마다 되게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뭔가 모자 라보이고 멍청해 보였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나를 그렇게 보겠지.라는 생각도 동시에 했다. 큰 스트레스였다.


고2 국어시간에 사투리에 관해 발표하는 조별과제가 있었다. 난 여러 지방의 사투리 정보를 찾아보던 중, 대전 방언 중 하나가 발음이 뭉개지는 것이라는 것을 보았다.


그것은 내게 큰 안도감이었다. 안심이 되었다. 내가 충청도에 살고, 충청도 사람이고, 새아빠도 대전 사람이고 혹시나 내가 살면서 그런 말투에 서서히 잠식되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불행한 희망이었다.


그래 봤자 작은 위로였다. 구구절절 사람들에게 대전 사투리라고 설명할 수도 없고. 그냥 말을 아끼기로 했다. 꼭 해야 한다면 천천히 했다. 천천히, 내 발음에 신경 쓰면서 말하니 침이 더 범람했고 혀는 미끄러져 자기 마음대로 소리를 냈다. 이상한 발음이 침보다 더 튀었고 나는 민망했다. 방금 발음을 이상하게 했다.라는 것을 알고, 부끄럽지만 내색은 안 하고, 다시 발음이 또 이상해지고 하는 악순환.


그때 즈음부터 구개음화도 제대로 되지 않았던 거 같다. 이거 해야 디? 해야 되는 거 맞디?


친한 친구들은 그냥 그러려니 했다. 근데 안 친한 사람이 걱정이었다. 첫인상을 결정하는 데 큰 부분일 수 있겠다 싶었다. 더욱 말을 아꼈다. 그럴수록 침이 더 나왔다. 꼴깍.


비염도 한 몫했다. 코가 막히고 가래가 끓으니 호흡이 답답했고, 말도 더 이상해졌다. 헛기침을 몇 번 하면 나았지만, 그거도 과하면 너무 바보 같았다. ㅡ사실 요즘에도 그렇지만ㅡ헛기침을 너무 자주 했다.


크, 흠, 흑. 그래서... 내가 그거를..., 흡, 이르케... 이르케...

다행히 내 발음을 놀리거나 문제 삼는 이는 없었다. 말하기 대회나 회장 선거 연설, 발표 같은 중요한 자리에서는 또 나름 말도 잘하곤 했다. 사석에서 편해질 때 즈음 불쑥 튀어나오는 게 문제였다.


발음 교정 책을 도서관에서 빌려서 천천히 읽어보기도 했다. 끈기가 없어서 그만뒀다. 그냥 천천히 말하고 말지.


발음은 사람의 신뢰도에도 중요한 영향을 준다. 그것도 걱정스러웠다. 난 절대 무식하거나 어딘가 덜 떨어진 사람이 아닌데, 게다가 충분히 믿을만한 사람이라고 자부하는데도 내 혀 때문에 그렇게 비칠 것 같아 두려웠다. 지금도 두렵다.


그래서 더 글을 쓴 것은 아니다. 뭐 영향이 아주 없다고는 못하겠지만 말을 조금 더 줄이고 천천히 하려는 노력 자체가 나쁘다고는 생각 안 한다. 그 원인이 나쁜 거지.


한 가지 안 좋은 점은, 내가 말을 하면 발음이 안 좋을 것이라고 으레 생각해서 자신감이 없어졌다. 그래서 목소리가 작았다. 말을 크게 해라.라는 말을 몇 번 들은 적도 있긴 하지만, 대수롭지는 않았다. 작은 것을 인정하기도 했고.


지금은 조금 나아진 것 같기도 하지만, 그래도 아주 가끔 신경 쓰이긴 한다. 목소리도 크게 하고 싶고, 내 말에는 나름의 깊이가 있는데 사람들이 음량과 발음에만 집중해 나라는 사람을 멋대로 판단하면 어쩌지 라는 불안도 크다.


내가 만약 누군가와 말을 할 때 발음을 뭉개거나 한다면, 그건 그 사람과 하는 대화가 재미있어서 여러 말이 떠올라서 성격이 급해졌거나, 아님 아주 편해서다. 가족들 앞에서 목소리가 작진 않지만 발음은 자주 흘린다. 다시 말하면 된다. 편한 사이니까.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도 말을 이상하게 하고, 그것은 거의 항상 웃긴 소재로 쓰인다. 나는 그것이 많이 즐겁다. 그리고 너도 그런 나를 닮는 것 같아서 좋다.


언젠가 심심하면 허공에 대고 크게, 그리고 정확하게 말해봐야겠다.


가나다라마바사

아자차카타파하


짧은 혀로, 넘치는 침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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