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그냥 Sep 14. 2022

장애는 이겨낼 것이 아니라 익숙해지는 것이다

<치유라는 이름의 폭력> (김은정, 후마니타스, 2022) 서평 에세이


구르님(김지우)이 운영하는 유튜브 채널 ‘굴러라 구르님’을 즐겨본다. 얼마 전 그는 자신의 장애 치유 경험을 주제로, ‘예쁘게 걷기 위해 수술한 나, 또 수술해도 괜찮을까요’라는 짧은 토론 영상을 올렸다. 뇌성마비 장애를 가진 그는 10살 때 “예쁘게 걸을 수 있다”는 정형외과 의사의 권유로 수술을 감행했다. 고통은 극심했고 무엇보다 예쁘게 걷게 되지 않았다. 그러다 휠체어를 만나고 새 세상이 열렸다. 걷지 않고도 어디든 갈 수 있는 수단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예쁘게” 걷기 위해 굳이 수술을 받아야 할까?  

    

이런 고민은 비단 그루님에게만 해당되지 않을 것이다. 좀 더 나은 몸을 가지기 위해, 더 솔직히 표현하자면 비장애인의 신체와 가까워지기 위해, 수술이나 치료로 인해 생길 수 있는 피해나 위험요인 또는 부작용을 받아들일 것인가의 고민은 다른 장애인에게도 마찬가지일 것이기 때문이다. 이 또한 비싼 비용을 감당할 경제사정이 되어야 할 수 있는 고민이지만 말이다.      


그루님은 오래 걷진 못하지만 걸을 수 있다. 뇌성마비 장애인의 특성상 까치발로 걷는데 무척 빠르다. 그루님의 영상 토론에 참여한 생리학 교실 교수는 까치발로 백 미터 달리기를 13초에 끊는 장애인 선수가 있다고 알려주며, 그루님의 까치발을 빨리 걷는데 적합한 발이라고 했다. 


이 말을 들은 그루님은 자신을 비틀린 발을 가진 장애인이 아닌 “빨리 걸을 수 있는 사람”으로 새롭게 감각하게 되었다고 신기해했다. 비장애인처럼 되기 위한 수술이나 재활에 매달리기  보다, 장애의 몸으로 잘 살 수 있는 능력을 기르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겠냐고 얘기하고 싶어 하는 듯했다.    

  


때마침 김은정이 쓴 <치유라는 이름의 폭력>을 읽고 난 후라, 나는 그루님의 생각에 크게 공감했다. 하지만 이를 정면으로 반박하는 이도 상당할 것이다. 장애를 극복할 무엇이라고 여겨 온 뿌리 깊은 비장애 중심주의는 장애를 비정상으로 규정하기 때문이다. 비장애가 장애보다  우위를 점하는 위계적 사회에서 장애는 교정되고 퇴치되어야 할 대상이다. “의학적 치료를 통해 질병과 장애를 없애고 건강을 회복하는” 치유가 당연한 듯 요구된다.      


이렇게 자행되는 ‘치유 폭력’은 장애나 질병을 삶의 다른 방식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이런 ‘치유 폭력’ 사회에서 장애인이 자신의 몸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고 자기 방식대로 살아갈 수 있을까? 이런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저자 김은정은 “장애를 인간 다양성의 가치 있는 한 부분”으로 여기지 않고, “장애나 질병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도록 사회적 환경적 변화를 만들어가는 일보다 치료를 우선시 하는 관점에 도전”할 것을 제안한다. 그루님도 수술이나 재활을 받지 않고 장애의 몸 그대로 살아가려는 자신을 삶을 포기한 게으르고 나약한 사람으로 취급한 현실을 토로한 바 있다.     


장애를 치료하는 “재활 훈련은 장애인이 다른 사람들과 동등한 기반에서 성공하기 위해 필요한 요소들을 전반적인 환경, 프로그램, 실행 방식, 직업에 포함시키도록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 요구되는 특정한 지식, 도구, 자원을 당사자가 갖추도록 하는 데 중점”한다. 즉 사회적 변화를 꾀하려는 노력보다 장애인 개인의 개조에 기대는 것이다. 장애를 소외시킨 채 진행되는 훈련-재활-회복-치유의 고된 과정은 “장애인을 가족과 지역사회에서 분리할 뿐만 아니라 그들의 삶을 유예시킴으로써 현재로부터 분리” 시킨다.      


<우리의 사이와 차이>를 쓴 지체장애인 얀 그루에도 그의 책에서, 교통사고 후 휠체어를 태워 내보내면 되는 사람을 걸으리란 보장도 없는 보행 훈련을 수년간 치르게 하는 ‘치유 폭력’을 비판했다. 그도 평생 해 온 물리치료를 중단하고 수술을 포기한 후 오히려 자기 몸에 대한 결정권을 회복했다. 그는 “스스로 결정한 방식대로 살 수 있었다.”      




치유 폭력은 가족 간에도 발생한다. 직간접적으로 장애인에게 영향을 미치는 가족은 ‘치유를 위한 대리인’으로 적극 나서게 되는데, 이때 장애를 치유하는 대리인으로서의 가족은 “장애인의 욕구를 대변하기보다 강제적 정상성의 시스템을 강화”하며 오히려 장애인을 수동적으로 만든다. 치유하지 않으려는 장애인은 가족에게 외면당하고, 어느새 집과 가족은 “건강한 몸을 요구하는 곳으로 변화”된다. 정상 가정의 기치 아래 장애인은 집에서도 눈에 띄지 않는 존재로 전락하거나 시설로 유폐된다.      


성 경험이 치유가 될 수 있을까     


저자는 치유 폭력의 한 축을 차지하는 사랑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성폭력을 다룬다. 소설이나 영화 등에 등장하는 성폭력 당한 장애 여성은 “강간으로 여성으로 인정받고 성적인 존재로 변화”하는 존재로 그려진다. 이런 폭력적 재현에는 장애 여성은 “아직 인간이 되지 못한 존재”라는 차별적 전제가 깔려있다. 치유 불가한 여성의 몸을 식민지 피억압 상태의 여성성으로 치환해 집단적으로 은유하는 치유 폭력은 남자 개인이 가하는 성폭력을 은폐하고 젠더 위계를 유지시키도록 기능한다.    

 


저자는 다루기 까다로운 주제인 장애인의 ‘치유로서의 성경험’도 신중히 다룬다. 스위스 한 단체는 장애인에게 마사지, 쓰다듬기, 안기 등 장애인 접촉자 프로젝트를 실시했는데, 종종 진보적 장애인 정책으로 언급되기도 한다. 하지만 저자는 우려를 표한다. 


선의를 가진 도움도 상징적 폭력을 가할 수 있고, 정책으로 성적 주체성을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것에 대한 성급함이 부작용을 초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장애인 성욕 담론은 “폭력과 성적 즐거움의 차이를 흐릿하게 하고 장애인이 지역사회에서 살아갈 권리, 친밀한 사회적 공간에 접근할 권리, 적절한 보조를 받을 권리”를 지울 위험이 있다.      


위에 언급한 지체 장애인 얀 그루에도 그의 책에서 치유 혹은 권리로서의 장애인 성경험에 관해 장애인 당사자로서의 생각을 밝혔다. 소아마비 중증 장애인이었던 마크 오브라이언이 섹스 대리인과의 성 경험을 쓴 <섹스 대리인과의 만남에서>에 대해 그는 이렇게 썼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그는 돈을 주고 성 경험을 했다고도 할 수 있다. 섹스 대리인이라는 단어를  치유적으로 사용하고 신체를 상품화하는 담론을 억압한다고 해서 그의 글이 저항과 승리를 의미한다 할 수 있을까?” 친밀성 없는 텅 빈 섹스마저 임상적 대상이 되는 장애인의 몸에 씁쓸함을 표한 셈이다.     


장애여성 활동가 이진희는 장애인 성적 권리 담론이 자칫 ‘성 서비스=장애인의 성적 권리’라는 도식으로 흐를 것을 경계한다. 이런 섣부른 도식은 장애인의 섹슈얼리티가 구성되는 사회문화적 맥락과 차별적 구조를 지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국가가 개입하여 성 서비스를 제공할 때 장애인의 성이 다시 치료나 재활 정책으로 의료화될 수 있고, 성매매를 둘러싼 복잡한 권력관계도 지워질 위험이 있다고 지적한다.   

   

이토록 복잡한 장애인의 성적 담론에서 성 서비스 담론의 주체는 누구인가를 생각해 볼 때, 어딘지 균형이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든다. 이 담론의 모든 주체가 장애인 남성이기 때문이다. 장애인 남성에게 성적 욕망은 반드시 해결해야 할 무엇으로 간주되는 반면, 장애인 여성의 성은 성적 욕망의 실현보다 성적 착취와 폭력의 대상이 되는 문제가 우선된다. 이러한 장애인 내부의 차이는 장애인이라는 한 범주에 장애 여성이 통합될 수 없는 젠더적 곤경을 드러낸다. 장애인의 성에서도 젠더의 위계는 엄연했다.      


장애(‘쇠약’)와 함께 살아가기     



결국 우리의 과제는 장애와 어떻게 잘 살아낼 것인가로 귀결될 것이다. 의학 역사학자인 줄리 리빙스턴은 개인의 정체성으로 규정되는 장애 대신 ‘쇠약’(dibility)이라는 용어를 쓸 것을 제안한다. 쇠약은 “손상, 결여, 몸의 어떤 능력을 상실”한 상태를 말하며, 이는 장애와 질병은 물론 노화로 인한 몸의 상태를 포함한다.      


나는 이 말에 공감한다. 내 몸은 장애로 규정될 수는 없지만 실로 많은 능력을 상실해 가고 있고, 이로 인해 삶을 상당 부분을 재구성해야 하는 상황에 봉착해 있기 때문이다. 덜그럭 거리는 관절은 통증을 일으키고, 시력 청력은 물론 전반적인 체력이 암담할 만큼 약해지고 있다.      


‘쇠약’을 ‘치유’한다는 수많은 의약품과 시술이 대대적인 몸 재건의 선봉에 서고 있다. 바이오센서로 건강을 모니터하고, 원격으로 몸을 진단하고, 개인 게놈을 디지털화해 흠결 없는 몸을 만들 수 있다고 호언한다. 바야흐로 디지털 헬스의 세상이 열리고 있다. 하지만 이런 디지털 의학 기술이 당장 집 밖을 나서는 데 어려움을 겪는 이들에게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쇠약한 이들의 목표는 내 몸이 디지털 ‘치유’의 대상이 되는 것이 아니라, 내 삶의 조건을 견딜만한 것으로 만드는 데 있다.     

 

‘쇠약’으로 몸의 기능을 잃어 가면서, ‘치유’하지 않은 채 삶의 환경이나 조건과 협상하며 매일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이해하게 된다. 무릎 통증은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는 것도 계단을 내려가는 것도 어렵게 한다. 장거리 운전은 포기한 지 오래됐고 한나절이면 해치우던 가사노동도 옛날이야기다. 느려진 내 몸은 이제 매우 더뎌진 시간 감각에 익숙해지며 살아간다. “장애(‘쇠약’)는 이겨낼 것이 아니라 익숙해져야 할 것이다.” 이 말을 새긴다.           

작가의 이전글 '돌봄 정의'에 대해 생각한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