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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냥 Sep 19. 2022

그 여자가 화가 난 이유

<그 여자는 화가 난다> (마야 리 랑그바드, 2022, 난다) 서평 


JTBC 드라마 <서른, 아홉>의 주인공 미조(손예진 분)는 일곱 살에 입양되었다. 다행히 입양 부모는 좋은 사람들이어서, 미조는 파양으로 닫아걸었던 마음의 빗장을 스스로 열 수 있었다. 그들은 꽤 괜찮은 가족이 되었다. 그럼에도 친생부모에게 버림받았다는 마음의 상처는 미조의 마음을 ‘불안’하게 했다. 잠을 못 이루고 공황 장애가 왔다. 미조는 누가 봐도 남부러울 것 없는 성공한 커리어 우먼이었지만 아팠다.      


그렇다고 미조가 불행했던 것만은 아니다. 미조네 가족 간 애정은 무척 도타웠다. 입양의 가장 큰 수혜자는 누구보다 미조라는 것을 믿게 하기 위해, 입양 가족은 최고의 선인들로, 미조를 낳은 생모는 악인으로 배치했다. 생모는 낳고 버린 아이를 빌미로 양부모에게 돈을 갈취하고 마침내 미조에게까지 손을 벌리는 파렴치한 인간이다.      


나는 이 극단적인 설정이 불편했다. 아이를 낳아 키울 수 없는 ‘미혼모’는 그럴 수밖에 없는 사정이, 또 아이를 입양해 키우려는 부모에게는 그럴만한 까닭이 있을 뿐인데, 이들은 각각 사기꾼 생모와 거룩한 양부모라는 선악의 이분법으로 대치되었다.      


이런 접근은 입양의 진실을 드러내기 어렵다. 이렇게 입양에 대해 발언하면, 입양 부모를 폄훼한다는 기함할 댓글이 달리곤 한다. 전혀 아니다. 이 글은 입양 부모를 욕보이기 위함이 아니다. 나는 ‘미조들’이 겪는 ‘불안’에 대해 얘기해보고 싶다.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이방인, 입양인     


입양인 제인 정 트렌카는 경계인으로 살았던 미국에서의 삶을 <덧없는 환영들>에 담았다. 그는 1972년 6개월의 나이에 미국 미네소타주의 한 백인 가정에 입양되었다.(입양은 아주 어릴 때 늦어도 한 살이 되기 전에 이루어지는 게 바람직하다고 여겨지지만, 심리학자 조 솔은 정체성을 확보할 수 있는 6~8세가 더 나은 선택이라고 본다.) 양부가 불임이었다. 양부모는 나쁜 사람들은 아니었지만 좋은 사람들도 아니었다.     



마음 붙일 곳이 없던 제인은 사춘기를 거치며 자신의 피부가 백인과 다르다는 것을 각성한다. 나는 누구인가 질문하기 시작한다. 질문을 좇아 한국으로 왔다. 다행히 친부모를 찾았는데, 맞닥뜨린 진실은 충격이었다.      

그는 미혼모인 엄마가 아기를 혼자 키울 수 없어 자신을 입양시켰을 거라 짐작해왔지만 아니었다. 제인에겐 부모가 있었다. 형편이 어려워 잠시 보육원에 맡긴 아이를 부모의 허락도 없이 입양시켜 버린 것이다. 입양 수수료가 쏠쏠했기 때문이었다.      


덴마크인 안더스 리엘 뮬러 박사가 “한국의 경제 기적을 이루었던 주체는 한국의 농민과 노동자, 그리고 ‘입양인들’”이라고 했을 정도로, 당시 입양 수수료의 규모는 한국 경제의 상당 부분을 떠받쳤다. 제인과 같은 입양인들이 이런 사기 입양이 “자비롭고 도적적인 행위”냐고 분노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입양이 한 사람의 존재를 완전히 돌이킬 수 없게 지워버리는” 피해임을 그들은 무시했다. 

     

분노한 또 한 사람의 입양인이 있다. 마야 리 랑그바드. 덴마크로 입양된 여자. 그는 “쌓인 울분 때문에 거의 죽음 직전에 이른 후에야 이를 치유하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그 여자는 화가 난다>를 썼다. 울분을 ‘화가 난다’고 털어놓고서야 아주 조금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안’에서 놓여날 수 있었다.   

   

그는 입양 중 특히 국가 간 입양에 관해 분노했는데, 국가 간 부의 위계로 구축된 불균형(선진국이 후진국의 아이들을 입양)한 입양 시스템은 그 자체로 부정의하기 때문이다. 부자 나라 양부모들은 가난한 나라의 아이들을 입양하고 그들을 구제했다고 믿는다.       


마야 리 랑그바드는 불임인 백인 부모에게 입양되었다. 덴마크 불임센터에 가면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입양 광고지를 볼 수 있는데, 그도 그런 경로로 입양되었을 것이다. 부자나라 양부모들은 아이를 낳을 수 없는 불행을 약간의 돈을 지불하고 상쇄할 수 있었다. 구제한 것은 아이가 아니라 그들의 손상당한 내면이었다.    


  

다행히 그의 부모는 좋은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마야를 입양한 것이 후진국 가난한 여성에게 베푼 선의라고 믿는 자칭 진보적 인사들이다. 하지만 그들은 마야에게서 한국 이름을 지웠고 마야를 백인처럼 대했다. 그렇다고 백인이 될 수는 없었다. 다른 피부색, 다른 입맛, 다른 감각으로 호기심과 끌림이 열리자, 마야의 자문이 시작된다. 나는 누구지?     

 

자신의 근원을 찾아 방황하던 마야는 자신이 매춘부의 아이였을 거라고 추측한다. 입양에 대한 뿌리 깊은 낙인이 스스로를 벌주게 한 것이다. 버림받은 아이 엄마의 가장 유력한 표상인 매춘부로 자신의 생모를 세우고, 자신 또한 생모가 속한 비천한 계급에 속한다고 믿는 자기혐오는 그의 삶을 얼마나 갉아먹었을까. 아무리 성공한들, 이런 자괴감이 밀려올 때마다 입양인은 내면을 휩쓰는 혐오의 쓰나미에 번번이 침몰했을 것이다.  

    

별 탈 없이 덴마크 사람으로 살 줄 알았던 마야의 믿음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대학 교육을 받았고 이를 기반으로 살아갈 터전도 있지만, 안정된 삶의 조건이 주어졌다고 결핍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인간은 그렇게 쉬운 존재가 아니다.  

    

돌아온 입양인   

  

그렇게 흔들리며 이끌려 한국에 왔다. 운 좋게 부모를 찾았다. 그의 추측과 달리 엄마는 매춘부가 아니었다. 그들 부모도 잠시 보육원에 마야를 맡겼는데 찾으러 가보니 사라지고 없었단다. 운이 좋다고 한 건, 한국계 입양인 중 친부모를 찾는 비율이 2.7%밖에 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렇게 터무니없이 낮은 비율은 입양인에 대한 정보를 한국 정부가 전혀 관리하지 않는다는 반증이다.     

 

마야가 화가 나는 말 중엔, 입양되지 않았다면 노숙자나 범죄자나 되었을 거란 어마어마한 저가 있다. 이 뿌리 깊은 편견은 여전히 ‘어린이 세탁’으로 이루어지는 영리사업을 숭고한 구원 행위로 은폐시킨다. 홀트아동복지회 홈페이지에는 한국을 “가장 안전하고 확실한 입양프로그램을 운영”하는 나라로 소개하고 있다. 이 ‘안전’은 누구에게 안전하다는 걸까?      


내면의 욕구를 좇아 한국에 돌아왔지만 마야는 행복하지 않았다. 가족을 만나고 “이유 없는 불안한 느낌”을 어느 정도 해소할 수 있었지만, 사십 년이라는 시간은 메우기 힘든 억겁이었다. 부모는 갑자기 등장한 막내딸이 어색했고, 자매들은 동생의 존재를 숨기고 싶어 했다.      



게다 부딪치는 한국인들은 마야가 한국말을 못 한다고 질책했다. 그를 먼 나라로 추방해 모국어를 빼앗은 나라를 탓하지 않고, 부적응자로 한국에 쫓겨 온 이방인이라고 모욕했다. 가족을 만나도 통역이 있어야만 소통할 수 있는 단절감은 치명적 곤경을 만들었다. 한국에 있으면 한국인이 아닌 것 같고, 덴마크에 있으면 덴마크인이 아닌 듯했다. 입양인들이 겪는 디스포리아적 곤경은 “납치당한 감정”에 가깝다.       


마야의 “이유 없는 불안한 느낌”엔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엄마 품이 그립고 엄마랑 자고 싶다.” 하지만 마야는 부탁하지 못한다. 잠든 엄마의 손을 살며시 잡거나 엄마의 불규칙한 잠든 숨소리를 엿들을 뿐이다. 이런 ‘마야들’에게, 부자 나라에 입양되어 잘 살게 되었으니 행운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한국에 돌아온 입양인이 모두 부적응자는 아니다. “조국의 친부모와 언어 및 문화를 상실하고 겪는 자연스러운 슬픔을 인정하고 받아들임으로써” 살아갈 힘을 다시 얻기 위해, 자신들을 버린 나라와 마주하기 위해 용기를 낸 것이다. 대부분의 입양인은 입양 부모에게 상처를 줄 수 있다는 죄책감 때문에 이런 용기조차 내지 못한다.     

 

내가 사는 파주에는 ‘엄마 품 동산’이라는 공원이 있다. 한때 큰 기지촌이었던 파주에는 혼혈아동이 많았고, 이들 대부분은 ‘GI베이비’로 미국으로 대거 입양됐다. 이들의 슬픔과 아픔을 위로하기 위해 공원이 조성되었다. 몇 년 전 나는 이곳에 들렀다가 우연히 한 입양 여성을 만난 적이 있다.      


덴마크로 입양된 그는 엄마를 찾으러 한국에 왔지만 찾을 수 없었다고 한다. 그저 한 번만 자신을 낳은 엄마를 만나보고 싶다고 소망했지만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루지 못한 소망을 안고 ‘엄마 품 동산’을 찾았다고 했다. 그가 할 수 있는 한국말은 ‘엄마’밖에 없었다. 짧은 영어로 알아낸 그에 대한 정보는 그의 삶의 곤경이나 ‘불안’을 무엇도 설명하지 못한다.      


마흔쯤 돼보이던 그는 누가 봐도 한국 사람이라고 할 외모였다. 지는 해를 등지고 서있던 그의 얼굴이 특별히 슬퍼 보이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길을 잃은 사람의 낭패감은 역력했다. 줄이 끊긴 연이 된 심정으로, 이 낯선 곳에 서성이고 있는 그에게, 조국은 대체 무슨 짓을 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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