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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냥 Mar 20. 2023

'동물성애자'의 종을 횡단하는 관계성

<성스러운 동물성애자> (하마노 지히로, 2022, 연립서가)


좀 어려운 얘기를 해보려 한다. ‘동물성애’에 관한 것인데, “동물성애란 인간이 동물에게 감정적인 애착을 가지고 때로는 성적인 욕망을 품는 성애의 양상을 가리킨다.” 정신의학적 견해로는 성도착증으로 분류되지만 이를 성적 지향으로 수용해야 한다는 소수 의견도 있다.      


이렇다 보니 ‘동물성애’에 대한 거부감이 상당하고 내 과문함 또한 커 다루기가 망설여졌다. 그럼에도 얘기를 꺼내보려는 건, <성스러운 동물성애자>를 쓴 저자 하마노 지히로가 ‘동물성애’를 통해 이른 섹슈얼리티의 관계성에 대한 통찰이 매우 인상적이고 감동적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저자가 교토대학 대학원에 발표한 인간, 환경학 연구과의 석사 논문들을 대중에게 어필하기 위해 다시 쓴 기록이다. 그는 ‘동물성애’를 연구하기 위해 세계 유일 ‘동물성애자’ 단체인 독일 제타(Zoophilia Engagement fur Toleranz unl Aufklarung)와 접촉했다. 인터넷상으로 오랜 시간 제타 멤버들과 접촉한 끝에 참여 관찰에 동의 받았다. 독일에 도착해 그곳에서 여러 ‘주파일’(그들은 스스로를 동물성애자를 일컫는 Zooohilia를 따 ‘주파일’이라 부른다)을 만나 함께 지내면서, 그들과의 인터뷰와 참여관찰을 통해 동물성애를 탐구했다.      


‘동물성애’를 비정상으로 바라보는 전제와 편견      


제타의 멤버는 압도적으로 남자가 많았다. 그래서 하마노가 만난 ‘주파일’ 대부분은 남자 ‘주파일’이었다. 이들 대부분은 ‘주파일 게이’이고, 동물에게 성기 삽입을 하지 않는 ‘패시브 파트’다. 이들이 동물 파트너에게 삽입 섹스를 하지 않는 이유는 인간의 섹스 방식을 동물 파트너에게 주입시키거나 훈련시켜서는 안 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지배적이고 착취적인 인간 간의 섹스 방식을 허용하지 않기 위해서다.     

 

이들은 서로의 성적 욕구를 감으로 알아채는데, ‘주파일’보다 파트너의 욕구가 더 많이 수용되는 편이다. “동물은 나에게 Person(그냥 ‘사람’이라 옮기기엔 미묘한 차이가 있어 Person으로 쓰겠다)”이라는 ‘주파일’의 관념은 이들이 동물 파트너를 완전한 인격체로 간주하고 있음을 반영한다. 이들은 “자신과 상대의 관계성을 통해 생겨나거나 발견되는 개념”으로서의 Personality를 매우 중시한다.  

     


‘주파일’이 매우 엄격한 성적 윤리로 파트너를 대한다 해도, 완고한 동물보호주의자의 입장에서 이들은 그저 동물 학대자다. ‘주파일’은 대부분 ‘패시브 파트’로 동물에게 성기 삽입을 하지 않지만(소수 ‘액티브 파트’는 삽입 섹스를 한다. 이들은 제타에서 소외되고 있다), 동물보호주의자들은 동물과는 합의가 불가능하다는 이유로 비폭력적 섹스라고 볼 수 없다고 주장한다.      


동물보호주의자의 주장엔 인간 중심적 전제와 뿌리 깊은 관념이 자리하고 있다. 우선 동물과 합의할 수 없다는 주장에서 합의란, 반드시 언어로 형성되어야 한다고 믿는 인간 언어 중심적 사고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인간의 언어로 이루어진 동의한 성관계가 반드시 합의된 것인가에는 큰 고민이 남는다. 남녀 권력관계의 위계에서 합의로 가장될 수밖에 없는 동의된 성관계는 얼마든지 존재하며, 동물이 드러내는 성적인 욕구(그들 나름대로 의사소통의 수단을 사용해)를 인간이 알아채고 이를 수용하는 경우를 동의가 아니라고 단언할 수만도 없다.     

 

저자가 관찰한 ‘주파일’의 파트너 동물들은 자신들의 성적 욕구를 무람없이 드러냈고, ‘주파일’은 이를 알아채지 못하는 것이 더 어려운 일이라고 했다. 동물 파트너를 ‘Person’으로 보고 관심과 사랑으로 쌓아가는 관계에서, 적극적이든 은근하든 파트너가 드러내는 성적 욕구를 알아차리지 못할 리 없다는 게 그들의 주장이고, 실제로 ‘주파일’은 이를 알아채고 받아들이고 있었다.    

  

또 한 가지 ‘동물성애’에서 기각되는 암묵적 전제는 동물들이 성적인 욕구가 없다고 간주하는 것이다. 동물이 성욕이 있다는 것을 몰라서라기보다, 애완이나 동반 주체로 인간과 함께 생활하는 동물이 서슴없이 성적인 욕구를 드러낼 수 있다는 것에 대한 거부나 불편함이 작용해서일 텐데, 이는 ‘동물과 성교하지 말라’는 기독교의 유서 깊은 ‘수간’에 대한 금기와 깊은 연관이 있다.   

   

동물과의 성적 관계를 ‘수간’으로 단정할 때, 동물성애는 매우 반윤리적이고 비정상적이고 도착적이라고 여겨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인간 간의 섹스라고 늘 윤리적이고 정상적인 것은 아니기에, 동물과의 섹스나 동물에게 끌리는 섹슈얼리티라고 반드시 정상이 아닌 무엇이라 단언하기는 석연치 않다.      



‘동물성애’를 비정상으로 간주하고 금기시하는 규범엔 또 다른 섹슈얼리티 억압이 교묘히 스며있다. 동성애를 비정상으로 몰아세우는 저변에 기독교의 케케묵은 가부장 수호가 버티고 있듯이, ‘동물성애’를 인정할 때 이성애의 기반인 가부장의 질서가 흔들릴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성규범은 정상적인 섹스나 섹슈얼리티를 이성애에 기반해 이를 기준으로 정상여부를 결정해왔고, 이는 남성 중심 사회를 공고히 유지해온 근간이다. 이 책의 해제를 쓴 정희진의 해석처럼, 남성 중심 사회에서 이성애는 이성애자체가 중해서가 아니라 남성 연대를 공고히 하기 위한 수단이며, “이성애는 다른 남성과 대등해지기 위한 하나의 장치이기 때문이다.” 

     

‘동물성애’를 통해 억압된 섹슈얼리티를 해방시킬 수 있었다     


이제 앞서 매우 깊은 인상과 감동을 남겼다는 저자의 성찰에 관해 얘기해 보겠다. 그가 어떻게 ‘동물성애’를 경유해 자기 성찰에 이르게 됐는지를 말하는 것은 사실 매우 가슴 아픈 일이지만, 고통을 통해 이룬 성취는 그 자신뿐 아니라 공동체의 성숙에도 크게 기여하리라 믿는다.    

  

그는 대학교 1학년 때 만난 남자와 동거를 시작했다. 동거남은 점차 하마노를 지배하려 들었다. 매사 간섭하고 상처 주다 마침내 학대하기 시작했다. 매일 “너는 살 가치가 없는 하찮은 인간이야”라고 폭언했고, 때렸고, 강간했다. 동거남의 폭력을 아무리 호소해도 그저 사랑싸움 정도로 치부 당하면서 그는 깨달았다. 그에게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그는 마지막 카드를 쓰기로 했다. 그와 결혼하는 것.      


무슨 소리인가 하겠지만 그에겐 이 방법밖에 없었다. 데이트 폭력은 무시되지만 가정폭력엔 가족과 경찰이 개입된다는 것을 이용해 마지막 도박을 한 셈이다. 그는 28세에 결혼한다. 그가 처음 폭력을 당하기 시작한 때로부터 10년이 흐른 때였다. 그는 결혼했고, 증거를 모았고, 이혼했다. 마침내 악마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악마에게서 벗어났다고 갑자기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그를 부끄러워하는 가족, 그의 피해를 의심하는 주변인들, 무엇보다 가장 죽도록 싫었던 건 바로 자신이었다. 그는 단지 피해자였지만, 오랜 시간 길들여진 폭력은 그의 몸과 마음에 자기혐오라는 맹독을 퍼뜨렸다. 이를 해독하기 위해 숱한 시간과 큰 고통이 동반되었다.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발버둥 치다 ‘동물성애’를 만났다.      



그가 대화하고 관찰한 ‘동물성애자’들은 그가 보아온 그 어떤 사람들보다 비폭력적인 섹슈얼리티를 누리고 이를 실천하고 있었다. 상대를 착취하고 지배하지 않으면서 있는 그대로의 서로를 받아들이며 고도로 윤리적인 관계의 대등함을 견지하고 있었다.      


하찮게 여기는 동물을 ‘Person'으로 대하는 그들은, “인간을 대체하기 위해 동물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다. 오직 동물에게서 위로받고 보살핌을 받는다. 그들은 처음부터 배신할 거 없는 ’사랑‘을 전해주는 상대와 살아가고 있다.”      


그들이 중시하는 종을 뛰어넘은 관계성은 그를 감화시켰고, 성장시켰고, 마침내 갱신시켰다. 오랜 시간 지속된 폭력적 관계로 왜곡된 관계성은 대체 사랑이 뭔지, 끌림(섹슈얼리티)은 뭔지, 섹스가 뭔지, 온통 혼돈으로 뒤범벅되어 있었지만, ‘주파일’의 관계성을 이해하며 폭력적 관계로 탈취당한 자기 존엄을 마침내 혐오 없이 수용하게 되었다.      


사라질 것 같지 않던 슬픔과 혐오와 불신과 고통의 농도가 조금씩 묽어지며 억압과 질곡을 해체하고 서서히 해방공간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책을 마치고 나면 저자가 해방된 억압의 땅에 같이 서있음을 느끼게 된다. 함께 누려보고 싶은 해방감이다.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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