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그냥 Apr 05. 2023

"환갑에 뜬" 정지아 작가의 <아버지의 해방일지>


<아버지의 해방일지> 작가 정지아씨 북토크에 다녀왔다. 일산 한양문고에서 진행했다. 홍보 사진에 등장했던 긴 머리의 ‘시티 걸’을 연상했다가 한방 먹었다. 그때 그녀는 언제 적 그녀일까? 


종종 글과 인물의 인지부조화를 겪을 때가 있는데, 지나고 보면 광고가 만들어내고 내 어리석음이 편집한 이미지의 혼돈 작이다. 환갑이 된 그를 상상하지 못하다니 내 아둔함이란... (그래도 출판사 등은 현재에 가까운 작가 사진을 써야 하는 게 아닌가?)     


글과 인물의 부조화만큼이나 글과 말이 현격한 인지부조화가 일어날 때가 있다. 내 경우 후자가 더 큰 한방이다. 이를테면 글은 너무나 ‘신박’한데 말은 어수선할 때, 내가 감명 깊게 읽은 그 책의 저자가 진정 저 사람이란 말인가, 하며 혼자 배신감에 운다. 그런데 이도 지나보면 자기 기만이다. 그는 썼을 뿐이고 말했을 뿐이다. 다만 내 스스로 주조한 목소리의 이미지로 혼자 읽으며 그라 상정했던 것뿐. 작가에겐 아무 잘못이 없다. 

    

정지아 작가는 글과 말이 조화로웠다. 말을 아주 단정하게 잘 했다. 글은 아주 좋지만 말은 그만큼이 아닌 경우도 있는데, 글을 잘 쓰는데 말까지 잘해야 하는 건 아니니 문제 되지는 않지만, 그의 경우 말도 좋았다.   

   

작가 스스로 ‘빨갱이의 딸’이라 표현한 대로 ‘빨갱이’의 자식다움이 흐릿하게 남아있었다. 풍화되었지만 알아볼 수 있을 만큼의 흔적이 남아있어 반가웠다. 호쾌해도 마지막까지 다 허물지 않는 웃음, 느긋해도 모두 수용하지 않는 밀당의 몸짓 등이 그랬다. 만약 붉은 기운이 싹 빠졌다면 서운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는 북토크를 시작하며 자신을 “환갑에 뜬 소설가”라 소개해 청중을 웃게 했다. 지금이야 이런 농을 하는 능청함이 생겼지만, 그 옛날엔 송곳처럼 예민한 소녀였다고 한다. 전교 1등을 놓쳐본 적이 없는 수재였지만, ‘빨갱이 딸’의 출세 길에 탄탄대로 같은 것은 없었다. 이 불일치를 서서히 깨달아가며 시대의 저주를 원망했으리라. 이렇다면 삐딱하지 않기가 어려운 터, 세상과의 불화는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어떤 이유이든 세상과 불화하며 사는 일은 힘든 일이다. 지치는 일이다. 하지만 끊임없는 불화는 지성을 예민하게 벼리게 하고, 예민함은 끊임없이 주변을 둘러보게 해 서걱거리는 부조화를 탐색하게 한다. 그러느라 통념에 안주할 틈이 없다. 이런 분주함은 좋은 작가가 되는 풍요로운 토양이 된다. 저주받은 인생이 작가됨의 발로가 되어 뻔하지 않은 글을 쓰게 한다. 


하지만 좋은 글이 언제나 주목받고 사랑받는 건 아니다. 까만 시간을 숱하게 보내고서야 <아버지의 해방일지>에 이를 수 있었다.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고 새로운 세상이 열렸다. “환갑이 되어 뜬” 작가로 거듭난 것이다. 축하할 일이다. 환갑이 되어도 주목받지 못하는 작가가 얼마나 많은가.     


나는 사실 <아버지의 해장일지>가 인생 책 정도는 아니었다. 지금까지 본 남도 사투리 나오는 소설 중 단연 으뜸으로 가독력이 좋았고 꽤 재미있다는 정도였다. 그런데 세간의 반응이 뜨거워서 좀 놀랬다.   

   

나는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읽기 전에도 빨치산 특히 여자 빨치산에 관심이 많았다. 빨치산에 대한 소설은 주로 이념을 기점으로 우익의 입장에서 이분법적으로 다루어지거나, 중도적으로 다루더라도 남자 빨치산 위주다. 이런 소설 속에 여자 빨치산은 주변화되어 가시화되지 않는다.    

  


그러다 전격적으로 여자 빨치산을 다룬 소설 <나를 마를린 먼로라고 하자>를 읽으며 그들의 삶을 가늠해 볼 수 있었다. 비슷한 시기 제주 4.3 빨치산 증언을 채록한 <선창은 언제나 나의 몫이었다>는 더 크게 사고의 지평을 넓혀 주었다. 빨치산으로 한데 묶을 수 없는 여자 빨치산의 삶이 오롯하게 다가왔다. 짓밟혀도 다 빼앗을 수 없는 그들의 존엄에 큰 해방감을 느꼈다.      


반면 <아버지의 해방일지>에는 빨치산 엄마의 행적이 드러나지 않는다. 북토크에서 그의 전한 사연으로 그 이유를 알 수 있었지만, 아버지의 “헥멩가” 흔적이 드문드문 드러나는 것에 비해 엄마의 행적은 언급되지 않는다. 과거 “헥멩가”였던 엄마는 어떤 사람이었을지 궁금했던 나는 이 부분이 적잖이 아쉬웠다.

      

하지만 그가 전한 대로, 어린 ‘빨갱이의 딸’에게 그만을 전적으로 사랑해 주고 보살필 사람이 필요했고, 그 사람이 엄마였다는 걸로, “헥멩가” 엄마의 유실은 상쇄된다. 아쉽지만 어쩌겠는가.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해방일지가 나온 것처럼, 백세를 바라보는 엄마와 이별한 후, <어머니의 해방일지>가 나오길 기대할밖에.   

  

정지아 작가를 보고 있자니, 어쨌든 성공은 좋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까칠함 그 자체였다는 사람이 유연해지는 걸 보면 말이다. 어쩜 그의 생애 주기가 삶을 성찰하게 하는 지점에 와 있는 탓도 있겠지만, 환갑이 된다고 모두 너그러워지는 건 아니다. 그의 때늦은 성공이 그의 수렴하는 생애 주기와 맞물리면서 인생 최정점의 화양연화에 이른 듯하다.      


화양연화는 맘껏 즐겨야 후회 없다. 문제는 그 시절이 화양연화라는 것을 모른다는 데 있다. 땅을 치고 후회해 봤자 지나간 시간은 돌아오지 않는다. 영리한 그는 잘 알고 있는 듯하다. 그리고 즐기고 있는 듯하다, 그의 화양연화를.      


벚꽃이 황홀하게 피어 가슴을 설레게 하더니 이내 꽃비를 내리며 사라지고 있다. 벚꽃은 내년에 다시 피어 또 한 번의 화양연화를 누리겠지만 인생은 그렇지 못하다. 지금이 그때려니 하고 사랑하고 소중할밖에.  



* <선창은 언제나 나의 몫이었다>와 <나를 마를린 먼로라 하자> 서평은 본 블로그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https://brunch.co.kr/@jupra1/128     

작가의 이전글 인종차별의 땅에서 딸을 키운 엄마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