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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태령 대첩’에 여성 농민이 있었다

‘남태령 대첩’에서 활약한 여성 농민과 여성 시민이 자랑스럽습니다!

by 그냥

한동안 텃밭 농사를 배운 적이 있다. 그때 한 강사 왈, “토종 씨앗을 찾으려면 어느 마을이건 제일 먼저 할머니네를 가면 된다”고 했다. 그 말인즉슨 씨앗 갈무리를 여성 농민이 해왔다는 뜻일 텐데, ‘할머니’로 쉽게 취급되는 여성 농민의 역할과 가치가 한반도 농사 역사에 매우 지대했음을 알 수 있다.


토종 씨앗은 우리 땅과 기후에 적응해 재해에 강하고, 무엇보다 비싼 로열티를 내는 1회용 씨앗에 비해 자가 채종이 가능해 지속 가능한 농사를 가능하게 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네 밭은 기업 씨앗에게 자리를 내준 지 오래다. 이에 대항하기 위해 토종 씨앗 운동이 벌어졌고, 내가 <언니네 텃밭>을 알게 된 것도 이를 통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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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네 텃밭>은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이하 전여농) 산하 여성 농민 생산자 협동조합으로 직접 농사를 짓는 여성 농민이 소비자에게 제철 농산물 꾸러미를 공급하는 사업이다. 흔한 농산물 공급 사업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조금 다르다. 이는 전적으로 여성 농민에 의해 주도되고 그 수익도 여성 농민에게 직접 돌아간다. 평생 부부가 농사를 지었어도, 영농인으로 등록되고 인정받는 당사자가 남성 배우자라는 현실을 짚어볼 때, 이 꾸러미 사업이 여성 농민에게 어떤 의미일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큰 소득이 아니고 각 꾸러미 공동체마다 상황이 조금씩 다르겠지만, 이 사업을 통해 여성 농민 개인에게 돌아가는 수익은 연간 500만 원에서 1,000만 원가량이다. 2001년 농업 평균 소득이 대략 1,200만 원임을 감안하면, 꾸러미 수익금이 여성 농민에게 의미 있는 금액이고, 무엇보다 여성 농민 명의로 된 통장으로 직접 수익이 들어간다. 나도 이 점이 좋아 꾸러미를 구독하게 되었다.


나는 좋은 농산물을 받아먹을 수 있어서 좋고, 여성 농민은 농사에서 자기결정권을 가지게 돼서 좋으니, 서로에게 좋은 일이 아닌가. 게다 이들의 농사가 수확량만 늘리는 관행농의 방식이 아니라 대안 농업을 제시한 농생태학에 뿌리를 둔다는 점에서, 이는 단순히 여성 농민 소득을 증대하는 이상의 의미와 가치를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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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농민의 생태학적 접근은 기후 재난과 식량 주권과도 연결되는 중대한 이슈이고, 한국 농업의 절반 이상을 여성 농민이 담당하고 있지만, 이들의 현실은 매우 척박하다. 농산물 출하와 정산은 물론, 농지도 남편 명의인 경우가 대다수이다 보니 여성 농민의 이름으로 대출을 받거나 투자를 해보기 어렵다.


또한 농사일의 일당도 여성 농민은 남성의 60-70% 밖에 받지 못한다. 남성 농민의 높은 일당은 여성 농민보다 더 힘든 일을 한다는 이유에서인데, 힘든 일의 대부분은 기계로 이루어진다. 이에 반해 여성 농민들은 하루 종일 쪼그리고 앉아 심고 캐고 풀 잡는 일을 하는데 어떤 농사일이 더 힘들단 말인가. 이렇듯 가족농의 가부장성, 제도적 불평등, 농사 노동에서의 성차별 관행 등으로 여성 농민의 법적 경제적 지위는 불안정하다. <일다 ‘농사에서 자기 결정권을 갖기 시작한 여성들’ 기사 참고>


<언니네 텃밭>의 개인 구독 경험으로 돌아와 보겠다. 언제인지 기억이 나지 않는 오래전(아마도 2009년이나 2010년 경이지 않을까), 처음 꾸러미를 구독하고 첫 물품을 받던 날, 생각지도 못한 기분에 휩싸였다. 박스를 여니 각각의 농산물이 종합선물세트처럼 제각각 신문지 등으로 조물조물 싸여 있었는데, 마치 시골 사는 엄마가 정성껏 갈무리해 보낸 보따리를 받은 기분이었다. 농사일로 거칠어진 굵게 주름진 손으로 하나하나 정성스레 싸 보낸 꾸러미 말이다. 감동이었다.


꾸러미 물품이라야 특별할 것은 없다. 제철 농산물과 두부와 계란 그리고 종종 직접 수확해 만든 반찬, 떡, 죽 등이 온다. 이제 새로울 것도 없건만 여전히 물품을 받을 때마다 반갑다. 함께 오는 메모지를 받는 것도 큰 즐거움이다. 농산물 수확 이력과 농사 상황 등이 적혀 오는데, 여성 농민들의 사정을 알 수 있어 좋다. 요즘은 물품 농산물로 조리하는 요리 레시피도 알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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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메모에는 계절 마다의 농사 상황이 담겨와 여름엔 물난리와 기후 위기로 작황이 어려운 현실 등을 접하기도 하는데, 여성 농민들의 노고에 감사와 자부심을 동시에 가지게 된다. 내 꾸러미는 횡성 공동체 <언니네 텃밭>에서 온다. 지난주 받은 알타리김치가 맛있어서 추가 주문을 넣었다. 종종 들기름 참기름 등 농 부산물을 구매하기도 한다. 작은 돈이라도 농사지은 여성 농민에게 직접 돌아간다고 생각하면 뿌듯하다.

새삼스럽게 왜 농산물 꾸러미 타령이냐고 하겠지만 이유가 있다. 지난 21일에서 22일에 걸쳐 펼쳐진 ‘남태령 대첩’의 숨은 주역이 바로 전여농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어 <언니네 텃밭이> 전여농의 사업임이 알려지면서 구독이 크게 늘었다는 소식을 들으니, 구독자로서 같이 기쁨을 나누고 싶었다.

‘남태령 대첩’에 트랙터를 끌고 상경한 남성 농민들의 투쟁과 더불어 “이 싸움이 존재하는 데 크게 기여한 여성 농민들도 기억해 줬으면 한다”는 신지연 전여농 충남연합 사무처장의 발언은 함의하는 바가 크다. “전봉준투쟁단의 트랙터 운전자는 모두 남성이다. 여성 농민 가운데도 트랙터를 운전할 수 있는 사람은 있지만, 고가의 트랙터를 소유할 만큼 경제적 주도권을 가진 여성 농민은 거의 없는 현실”을 지적하며, “돌봄이 필요한 가족이 있거나 농사 현장을 비울 수 없어서 트랙터 대행진에 참여할 수 없는 여성 농민도 있다”고 했다. 이는 트랙터 ‘남태령 대첩’이 탄핵 시국과 연결된 농민 투쟁임을 알리는 동시에, 농민 투쟁과 ‘성평등한 농촌 만들기’가 각기 다른 투쟁이 아님을 역설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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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여농과 더불어 ‘남태령 대첩’에 또 다른 숨은 주역들이 있으니 바로 28시간 경찰과 대치하며 현장을 지킨 시민들이다. 시민들이 탄핵 집회장마다 두려움을 떨치고 일어나 역사의 또 다른 한 장을 써나가고 있다. 그중 여성 시민의 역할이 돋보였다. 탄핵 집회 어디에나 사회적 약자였던 이들이 길을 열고 있다는 사실은 충격적인 감동을 안긴다.


나는 이런 젊은 여성들의 정치적 주체성을 ‘용주골 투쟁’에서 이미 확인한 바 있다. 먼 거리를 마다 앉고 용주골에 비상사태가 벌어질 때마다 결집하는 여성 청년들을 보고 나는 굉장한 충격과 감동을 느껴왔다. 이들은 여성이라는 약자성이 어떻게 사회에서 배제되고 혐오되는지를 정확히 이해하고, 약자성을 극복하는 길이 가부장이나 정상성에 부역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를 해체하고 낙후시기는 데 있음을 연대로 증명해 왔다.

서로의 취약함을 드러내고 끌어안을 용기가 이들에게 있었다. 탄핵 광장에서 투쟁 현장에서 이들을 만나게 된 것은 돌발 해프닝이 아니다. 이들의 정치적 주체성은 이미 발아되고 성숙되었고, 일촉즉발의 남태령을 지킨 힘으로 드러났다. 농민과 함께 ‘남태령 대첩’을 치룬 여성 시민 파이팅이다. 그리고 다시 한번, ‘남태령 대첩’의 주역, 여성 농민들에게 존경과 감사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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