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주골 시의원 감사 현장에서
요즘 디즈니 플러스 <나인 퍼즐>을 흥미롭게 봤다. 살인마?는 연쇄 살인 현장에 퍼즐 조각을 남겨 메시지를 던지고 있었다. 마침내 밝혀진 살인들의 진실은 재개발이 부른 사무친 원한이었다. 같이 보던 딸애가 재개발을 둘러싸고 벌어진 가공할 비리와 모략과 중상과 협박과 폭력을 보다, “(가해자들에게)죽어야 겠네”라고 선선히 말했다. 피식 웃었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에 정말 죽어야 하는 자들은 얼마일까? 내 주위만 둘러봐도 벌써 열 손가락이 넘는다. 나 너무 과격한가요?ㅎㅎㅎ
이런 복수극의 장점은 뭐니 뭐니 해도 대리 해원(解怨)이다. 마땅히 죽어야 할 자들이 죽으니 일단 속이 후련하다. 이 드라마는 가해와 피해의 딜레마를 교묘히 배치해 죽어 마땅한 자가 죽었는데 뒷맛이 개운치는 않은 애매한 심판의 자리에 시청자를 세우지 않음으로써 복수극의 본령을 성실히 해낸다. 다만 ‘눈에는 눈, 귀에는 귀’라는 복수의 정률을 명백히 넘어서고 있다는 점이 문제적이긴 하지만.
여튼 죽어 마땅한 자들이 복수자의 손에 죽었다. 다만 복수자가 피해 당사자는 아니다. 이런 경우 대리 복수자는 ‘너의 복수가 정당하냐’라는 심문을 피할 수 없다. 이는 상당히 까다로운 논란거리지만 일단 통과.
피해 당사자가 아닌 복수자가 나섰다는 것은 우선 복수자가 매우 뜨거운 피를 가진 때문일 테지만(싸이코패스가 아니라는 전제 아래, 그 동기가 피해자에 대한 사랑이든 정의감이든), 사실 이런 경우는 현실에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받쳐 뚜껑이 열릴 지경의 빡침이라도, 우리 순간 다혈질 인간들은 길면 며칠 짧으면 몇 시간 안에 뚜껑 열리게 격분했던 사실을 잊고 말지 않는가. 이런 점에서 10년 넘게 복수를 계획하고 9명이나 되는 죄인을 정성껏 죽이는 살해를 실행한 자는 극히 드문 대기만성형 고지능 복수자라 할 것이다.
대리 복수의 어쩌면 이상적인 방식이랄 수 있는 것은 공적 복수이겠다. 허나 이는 그 사회가 죄에 대한 민감성이 도드라져야 하겠지만, 아시다시피 우리 사회는 둔감하기 이를 데 없다. 공적 복수가 실행되기 위한 일차 조건은 그 사회가 정의에 대한 윤리적 기강이 제법 강건하게 잡혀 있어야 한다. 하지만 이도 알다시피 한국 사회는 해방 후 적극 친일파라도 처단하려 결성된 반민특위조차 해체시킨 졸렬하게 기강 없는 나라이지 않은가.
이후 유신으로 국민을 벌벌 떨게 하고, 또 이후 광주에서 피의 계엄을 자행한 우두머리조차 잠깐 가두었다 풀어주는 정치적 쇼가 횡행하는 정말 기강이랄 게 없는 한심한 나라다. 이러니 한 탕에 대한 욕망이 정재법계에 드글드글하지 않은가. 이제는 비열한 욕망을 숨기지조차 않는 무치의 사회다. 대선 토론장에서 성폭력 재현을 아무렇지 않게 지껄여 지켜보던 시청자를 순간 멘붕에 빠뜨려 놓고도 뭘 잘못했는지를 몰라요. ㅋㅋㅋ. 할 말 많지만, 그 판은 말하자면 끝이 없으니 이 정도만,,,
이렇게 기강이 없는 나라에서 사회적 약자의 굴욕과 죽음(끊임없는 산재 사망, 생활고 자살, 몇 십만 원 빌렸다 지옥문이 열린 자살 등...)은 일별조차 되지 않는다. 드라마 <나인 퍼즐>에서 악의 씨앗은 재개발의 이권을 싸고 떼 돈, 큰 돈, 작은 돈, 푼 돈, 오직 돈, 돈, 돈을 노리는 욕망에서 발아했다.
이익을 좇느라 미친 일당들에게 약자는 투명 인간이다. 재개발로 삶의 터전을 잃고 이곳이 허물어지면 오갈 데도 없는 사람들은 이미 인간이 아니다. 몽둥이로 때려잡고, 웅크리고 자고 있는 집을 포클레인으로 찍어 부수고. 이도 모자라 불을 놓는다. 싹 다 죽으라는 저주를 내린다. 불이 나는 현장을 보며 시청자 대부분은 용산을 떠올렸을 테지만, 나는 이상하게도 용주골이 생각났다. 이 얘기를 하기 위해 이리 긴 도입이 필요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뭐 뒷말은 할 말이 많지 않다. 2년 넘게 짖어보아도, 응답해 주어야 할 권력자 누구도 반응이 없으니 무익한 짓을 하고 있다. 오늘은 용주골에 시의원 나리들이 45억을 들여 개발을 벌이고 있는(이 중 대부분은 건물주에게 매입비로 주었다) 현장을 감사하러 오신다기에 달려가 보았다.
시의원 나리들이 에어컨 빵빵 터지는 근사한 승합차에서 내려 감사 보고를 받으러 들어가신다. 방청 좀 하겠다는 내 청은 간단히 무시당했다. 할 수 없어 큰 소리로 몇 마디 했다. ‘당신들이 승인해 준 집결지 해체 예산 45억이 이렇게 무익하게 쓰인 것에 책임감을 느끼나요?’ 이 정도야 시민이 할 수 있는 의사 표현 아닌가.
지난해 의회에서 시민 몇이 부당 예산에 항의했다고 ‘정신 차려’라고 폭언하는 시장을 왕처럼 받드는 도시(파주시임을 알립니다!)이다 보니, 어느새 나쁜 물이 든 것인가. 보고받고 나오는 시의원 나리들이 내게 눈을 째릿하더니, “그렇게 소리 지르고 그러면 다들 싫어해요”라고 대뜸 훈계질을 하는 게 아닌가. 흠, 나 미움받을 용기 많은데...
거친 표현이지만 싹 수 없다고밖에 말할 수 없다. 그런 말조차 듣기 싫으면 시민의 소리를 받들고 실행해야 하는 시의원직을 내려놓으란 밖에. 그런 소리-큰 소리, 작은 소리, 아픈 소리, 슬픈 소리-듣고 다니는 게 시의원의 직분인 걸 모르는 자들은 정치인 자격이 없다. 내년 지방 선거를 코앞에 두고도 그런 훈계질을 할 수 있는지 두고 보자고 혼자 앙심을 품었다.
시의원 행차에 굽실거리는 공무원들, 답답한 속마음을 조금이라도 토로하고 싶어 주위를 맴도는 주민들을 보다 보면, 요 시의원 나리들 자기들이 뭐라도 되는 줄 착각하기 십상. 초선에서 재선 삼선하며 매너리즘에 젖어 감히 고관대작 행세를 한다. 자신들만 모르는 나락으로 떨어진 권위를 시민에게 조용히 말하라고 으름장을 놓는 데 쓰는 한심하고 타락한 정치인이 된 것이다.
그래 시의원 나리들아, 조용히 말하면 내 말을 들어주고 좋은 정치를 해 줄 것이냐. 그럼 다음번엔 나리들 귓구멍에 대고 속삭이겠다. 귓속말을 하겠다. 앗, <나인 퍼즐>에서 둘째 퍼즐이 생각나네. 귓속말하는 그림이었는데, 그 결말을 알려주랴.
귓속말의 대가는 죽음이었다. 문득 귓속말 그림이 있는 퍼즐 조각을 나리들의 사무실에 남겨두고 싶어지네. 아 나 너무 드라마의 복수에 과몰입했나? 흐흐흐. 제발 이런 사적 복수에 매달리지 않게 정치질 좀 잘해보든가. 훈계질 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