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개발에 쫓겨나고 죽어가는 사람들
“왜 사람을 죽여 사람이 사는 곳을 만들지?” 이 대사에 마음이 우르르 무너졌다. 이 말은 디즈니플러스 드라마 <나인 퍼즐> 최종화에서 승주가 한 말이다. 그녀는 연쇄살인범으로, 이 말을 각혈처럼 토해놓고 제가 놓은 불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잠시 후 그녀가 불속에서 지르는 비명은 몸이 타들어가는 홧홧한 고통이자, 재개발을 위해 가난한 사람들을 내쫓고 죽이고도 일말의 죄책감조차 없이 잘도 돌아가는 이 사회를 향한 발악이었다. 그런들 누가 그녀의 고통과 분노와 절망에 응답하겠는가. 어쩌다 사회는 이토록 같이 살아가야 하는 인간의 구실을 잃어버린 걸까.
한 100페이지쯤 읽은 책 <모든 것의 새벽>에는 전 지구적 사회가 당연시 여기는 경쟁과 낙오, 그리고 이들 낙오자를 ‘루저’라 경멸하며 일말의 연민조차 없이 사회 밖으로 내치는 불평등에 대해 논하고 있다. 책은 왜 불평등한가를 논박하는 대신, 불평등이라는 어젠다가 공공연히 자리 잡게 된 엉터리 과정을 루소를 소환해 전달한다.
불평등의 엠블럼처럼 여겨지는 루소는 단 한 번도 불평등을 말한 적도, 불평등이 이기적인 인간이 도달하는 자연스러운 사회 변화 단계라고 말한 적도 없지만, 그의 글과 저서는 아전인수로 해석되어 불평등이 사회 진화의 필연적 과정이라고 믿게 만들었다는 게 저자들의 주장이다. 자연화된 의제는 불평등을 행하는 쪽이건 당하는 쪽이건, 이에 이의를 제기할 필요를 소거하게 한다.
원래 그런 거래 인간은 그리고 사회는. 그러니 어쩌겠어, 그냥 이렇게 살아가야지. 뭐 정 힘들면 죽든가...
그래도 살아보고 싶은 사람은 죽기 싫어 정신과를 찾아간다. 꽤 얼마 전부터 다들 느끼고 있겠지만, 정신과가 정말 많아졌다. 00 신경정신과, 00 상담소 등 빌딩에 널린 간판을 보고 있자면, 이걸 다행이라 해야할지, 세기말적 병리적 현상이라 고민해야 할지 모르겠다. 저렇게 많은 곳의 한 곳에 드라마의 연쇄살인범 승주도 있었다.
환자로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정신과 의사였다, 정신분석가였다. 그런 그도 자신의 정신을 구제하지 못했다. 어찌 보면 정신 분석의 실패라 해야 하나. 그는 환자에게는 이렇게 말했을지 모른다. ‘정신이 병드는 데 사회 같은 건 중요하지 않아요. 당신이 아픈 건 어린 시절 때문이에요, 트라우마 때문이에요, 성적 도착 때문이에요.’ 그렇게 아픈 사람들을 치료해왔겠지만, 막상 자신의 고통은 발본할 수 없었다.
그녀는 자신이 이 모양인 게 어린 시절 엄마에게서 버려졌기 때문이라며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꼭 엄마를 찾아내 갈기갈기 찢어 죽이겠다고 수도 없이 다짐했다. 하지만 밝혀진 내막은 그 엄마는 자신을 버린 것이 아니라 잃어버린 것이었고, 삶의 터전이었던 식당에 언젠가 찾아올지 모르는 딸을 기다리다 결국 한밤중에 강도처럼 덮친 재개발 용역들에게 처참하게 맞고 쓰러져 불더미 속에 죽어갔다는 것이었다. 진실을 직면하고 자신의 어리석고 어처구니없는 복수심이야말로 자근자근 씹어버리고 싶지 않았겠나.
그녀는 미쳐 돌아가는 사회가 정신 분석으로 치료 불능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해답은 진료실 방구석이 아니라, 너절한 약이 아니라, 저 불평등한 사회에 있지 않은가. 아픈 사회를 고치기 위해, 엄마를 태워 죽인 놈들을 하나하나 찾아 정성껏 죽이고 퍼즐을 남긴다.
그러나 돈 귀신에 씌어 엄마를 죽인 이 원수들을 그저 죽인들, 썩은 사회의 환부를 도려낼 수도 징벌할 수도 없음을 알았을 테니, 정신분석가인 그녀가 택한 방식은 퍼즐 조각으로 메시를 남기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이 사인을 알아챌 메신저를 택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메신저 환자를 이용해 복수 살인을 저질렀어도, 정신과 의사로서의 자괴감과 딜레마는 남았을 것이다. 사회가 아프게 만든 환자는 정신 분석으로든 약으로든 치료할 수 없다는 것, 정신 분석의 필연적 패배였다. 마치 한 인간이 사회와 무관한 진공관에 있기라도 한 듯, 내면의 어린 너만 잘 보살피면, 상담만 잘 받으면, 약만 잘 먹으면, 깨끗이 낳아 사회로 복귀할 수 있다고 기만하지 않았던가. 마치 차별을, 배제를, 소외를, 종당엔 불평등을 자연으로 여기는 야수 같은 사회는 저만치 묶어두었다는 듯이 말이다.
재개발로 쫓겨나 아픈 사람들
흔히 ‘미아리 텍사스’로 불리던 지역은 재개발되며 건물주나 대항력 있는 임차인만 보상했다. 하루아침에 살 곳을 잃은 종사자들은 거리로 나앉았다. 불안하게 웅크리고 자던 어느 밤, 용역이 집을 부수고 들어와 종사자를 난짝 들어냈다. 잠옷만 입은 채 아무것도 챙기지 못하고 맨몸으로 쫓겨났다. 그런 이들이 36번째 성북구청 앞에서 이주대책을 세워 달라고 아우성을 치고 있지만, 누구도(구청장, 지역구 시의원, 국회의원, 대통령) 정치적 책임감을 느끼지 않는다.
드라마가 상징하는 불타는 망루는 비단 용산만이 아니라 지금 도시 여기저기서 재현되고 있다. 가난한 사람이 살던 집을 밀어내고 번쩍이는 마천루를 세워 개발의 이익을 얻기 위해 아무 대책 없이 사람들을 쫓아내고 있다. 몸 누일 방 한 칸이라도 마련해 달라는 이들의 목소리 같은 것은 묵음 처리되고 있다.
제멋대로인 용주골 재개발도 그렇다. 민간 재개발을 취소시키고 파주시가 전면에 나섰다. 구관 신관 해서 적어도 백수십 동의 건축물이 있는 집결지에 현재 영업하고 있는 건축물의 건물주만을 회유해 건물을 사들였다. 시민의 피땀 같은 세금으로 집결지 먹이 사슬 최정점에 있는 건물주에게 보상을 제공한 것이다.
사들인 건물을 허물고 ‘성 평등’ 센터를 짓고, 누가 봐도 예산 낭비에 볼 사람도 쉴 사람도 없는 ‘치유 정원’이라는 이물스런 꽃밭을 만들었다. 옛 기지촌에 대한, 기지촌의 유산인 집결지에 대한 성찰 없이, 이 꽃밭을 보고 즐기고 한가롭게 그네를 탈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누구의 치유를 위해 잔인한 꽃밭을 만들고 예쁘지만 잔인한 꽃을 보며 죽고 싶은 심정을 가지게 만드는가.
이 지경으로 인권이 참담히 무너지는 곳에, 집결지 폐쇄라는 가장된 정의의 깃발만이 퍼덕인다. 인권이 무너진 이곳은 약자들의 무덤이다. 무덤의 묘비에 이 말이 새겨진다. “왜 사람들을 죽여 사람 살 곳을 만들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