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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둔형 외톨이’가 라이프스타일이 될 디스토피아?

by 그냥

이제 불평등은 기본값이 된 걸까? 세상이 돌아가는 방식에 대들어봐야 모난 돌 정 맞을 꼴이라, 피 철철 흘리기보다 저마다 ‘소확행’에 몰두하거나 이도 지치면 은둔하게 되는 걸까. MZ ‘은둔형 외톨이’를 주인공으로 삼은 드라마가 전면에 등장한 걸 보니 말이다.


호평받은 드라마 <미지의 서울>에서 미지를 위로하는 할머니의 명대사가-“사슴이 사자 피해 도망치면 쓰레기야? 소라게가 잡아먹힐까봐 숨으면 겁쟁이야? 다 살려고 싸우는 거잖아. 미지도 살려고 숨은 거야. 암만 모냥 빠지고 추저분해 보여도 살자고 하는 짓은 다 용감한 거야. ”-MZ의 심금을 울렸다 한다. 저 정도로 지지해 주는 할머니가 있는데 은둔이 합리화될 수 있을까 고민하느라, 그리고 더없이 자애로운 조모의 대척점에 엄마를 가해자로 세운 것도 마땅치 않아, 나는 미지의 후퇴와 은둔에 그리 공감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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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보던 딸애는 미지의 서사가 MZ의 회피 성향에 꽤 공명하는 듯하지만, 결국 극복해야 하는 건 자기혐오이지 않겠냐며 꽤 진지한 생각을 밝혔다. 여기다 ‘히끼꼬모리’는 완전히 밀레니엄형 라이프스타일이지 않겠냐는 의견을 덧붙였다. 집에 처박혀있어도 인터넷은 연결되니 게임을 하든 OTT를 보든 하루 종일이라도 놀 수 있을 여건이 되고, 또 온라인상으로는 타인과 연결되어 있다고 착각할 수 있으니, 꼰대 세대가 진저리치는 것만큼 은둔이 그들에게 몹쓸 삶은 아닐 수 있다는 설득력 있는 촌평을 내놨다.



딸애의 의견에 꽤 걸맞은 사례가 주변에 꽤 있다. 지인 A의 큰아들은 취준생을 삼 년째 하고 있지만, A가 보기에는 취업을 알아보지도 않는 것 같다며 한숨을 쉬었다. 아직은 세상과 단절하고 있지는 않지만, 대부분의 시간을 제 방에서 게임을 하며 보낸다는 걸로 봐서 단절도 서서히 진행될 수 있지 않을까 우려된다. ‘은둔형 외톨이’라고 처음부터 전격적으로 은둔했다기 보다 서서히 세상과 멀어진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A의 집 사정은, 가장인 남편은 정년을 코앞에 두고 퇴직 후에는 편의점 알바하겠다고 계획을 세우고 있다는데, 장대 같은 아들은 단시간 알바조차 하지 않는 형편이다. 청년세대는 어찌 생각할지 모르지만, 장년 세대가 보기에 A의 아들이 일정 정도 나태하다고 보지 않을 도리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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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위 ‘베이비부머’ 세대인 장년 세대는 지금처럼 부모가 자식을 든든히 지원해 줄 형편도 아니었고, 나라 자체도 알량한 복지조차 제공할 깜냥이 없었다. 이런 상황이니 뭐가 됐든 제 앞가림은 스스로 하는 게 당연했고, 집에서 은둔이라니... 이는 사람 노릇을 포기한 인생으로 낙인되었다. 물론 당시의 근면을 강조하는 노동관이 다 좋달 수 없다는 것은 전적으로 인정하지만 그땐 그랬고, 그런 세대들이 부모가 되어 자식들이 방에 처박혀 얼굴조차 볼 수 없을 정도로 가족은 물론 사회와도 단절된 생활을 한다는 것은 억장 무너질 일인 것이다.



A 말고도 대책 없는 취준생 아들을 둔 또 다른 지인 B도 있다. 대학 졸업한 지가 꽤 됐는데 이 아이도 집에서 게임만 하고 있다니 어쩌면 좋을까. 어려서는 영재 소리도 들었고 대학도 학과도 괜찮은 데를 나왔는데 취업이 어렵단다. 청년 취업난이야 하루 이틀 일이 아니고 정말 답답하지만, 그렇더라도 장대 같은 아들 녀석이 하루 종일 방에 처박혀 먹고 또 먹고 게임하고 또 게임하다 아침에 자고 밤에 일어나는 루틴을 반복하며 일 년여를 보냈다니, B가 어쩌면 좋을지 모르겠다고 한숨을 쉬는 데 격하게 공감되고 말았다.


사실 일자리야 없달 수야 있겠는가. 눈에 차는 일자리는 없고 고되기만 하고 워라벨 안 되는 일은 하기 싫은 것이지. 옛날부터 노동에 귀천 없다고 구라를 떨어왔던 건 새빨간 거짓말인 게 천하에 밝혀졌고, ‘천’하지만(절대적 ‘천’함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천’하다고 공인한) 필수적인 일에 이젠 외국인 이주 노동자가 아니면 돌아가지도 않는 지경이 되었다. 한국 사회가 삶의 수준이 높아진 탓도 분명 있겠지만, 노동이라는 가치 판단이 상당히 저급한 것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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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배우자는 차를 고치는 일을 평생 해왔지만, 그도 우리 가족도 그의 일을 부끄러워한 적이 없다. 그런데 타인이 그의 일을 부끄러워한 웃지 못할 상황에 놓인 적은 더러 있었다. 딸애가 어렸을 때 학교 모임에 갔는데 애 아빠 직업을 묻길래 차 고친다고 했더니 낯빛이 바뀌는 것을 여러 번 겪었다. 그게 무슨 뜻인지 나는 알고 그렇게 재수 없게 구는 자를 되려 경멸할 수 있지만, 혹시 딸애가 상처받을까 살짝 우려했던 적은 있다. 제 힘껏 제 몸을 움직여 돈 벌어 가족 부양하는 게 얼마나 더 떳떳할 수 있겠는가마는, 세상은 육체노동에 ‘천’함을 입혔다.


얼마 전 나재필의 <나의 막노동 일지>를 흥미롭게 읽었다. 평생 글 쓰는 일로 업을 삼던 이가 다 때려치우고, 소위 ‘노가다’라는 공사 현장 노동자로 전업한 후 건설 노동을 해나가며 겪은 육체적 심리적 단련 과정을 찬찬히 쓴 글인데, 좋았다. 군더더기 없는 글을 르포 식으로 현장감 있게 전달한 게 강점이고, 무엇보다 ‘막노동꾼’으로 근육이 단단해지며 정신까지 옹골차지는 영육의 정화가 인상 깊었다.


그에게 막노동만큼 정직한 일은 없었다. 신문사에서 펜대 굴려 가며 잔머리 굴려 가며 살아남으려 졸렬했던 노동보다 막노동이 훨씬 공정했다. 몸은 적응해 갔고, 하루하루 단련되어지며 효능감이 높아지는 막노동이 정말 좋아졌다. 현장에서 늙은 초짜로 설움이 없던 것은 아니지만, 호구지책만큼 엄중한 것은 없으니 견딜 일이었다. 문제는 일감이 줄창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 일자리가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곳이면 자취생이 된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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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장년에 시작한 막노동이 수월했을 리야 있겠는가. 여기저기 아프지 않은 곳이 없고 파쓰 냄새가 떠나지 않는 몸이 되었다. 그래도 그는 자신의 막노동을 아주 좋아했고, 일감이 있는 한 건강이 허락하는 한 하고 싶어 했다. 함부로 폄하하는 막노동에 대한 편견을 걷어내고 ‘땀은 정직하다’고 써 내려간 그의 인생 2막 막노동기는 귀하다. 하지만 한국 사회가 산재 사망률 1위인 것 또한 동시에 각인해야 할 것이다. 어제도 맨홀에서 작업하려 내려갔던 노동자가 사망하는 사건이 벌어지지 않았는가 말이다.


그런데 이걸 어쩌지... 불평등을 화두로 붙잡고 책 <모든 것의 새벽>에 대해 썰을 풀어 볼까 했는데, 새도 단단히 새고 말았다. 벽돌 책에 담긴 내용이 하도 방대해 내 깜냥에 대들어보기가 엄두가 안 나 배회하다 이리 되었는지도 모릅니다만, 독자님들의 양해를 구하며 위 주제는 다음번에 이어가 보겠습니다. ㅎㅎ 가사 노동(저녁밥 지으러)하러 가야 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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