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아이 이야기> (Anna Kim, 2025, 을유문화사) 서평
독특한 소설을 읽었다. Anna Kim의 <어느 아이 이야기>. 작가 역시 독특한지라 어떤 정체성이 마땅할지 모르겠다. 한국에서 출생해 두 살 때 독일로 이주했으니 독일인이자 한국인이라 해야 할까, 지금은 오스트리아에 거주하고 있으니 오스트리아인이라 해야 할까. 일본, 미국 등의 디아스포라 문학은 꽤 있지만, 독일(오스트리아) 디아스포라는 드문 터라 인상 깊었다.
아이의 아빠를 밝힐 수 없는 곤경
소설 제목이 내포하는 ‘어느 아이’는 소설 속 주인공 어린 대니얼이기도 하고, 화자이자 또 다른 주인공인 프란치스카이기도 하다. 대니얼이 흑인과 백인의 혼혈이라는 인종성은 프란치스카가 오스트리아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의 혼혈이라는 점으로 연결된다. 이 끈을 잡고 프란치스카는 대니얼의 이야기를 듣게 되고 일종의 미션을 수행하게 된다.
소설은 1953년 태어난 한 사내아이와 이 아이의 남다른 외모에 관한 보고서로 시작된다. 이후 이 아이의 인종적 정체성을 파악하기 위해 지속적인 관찰로 이어지는 보고서는, 인종적 정체성이 비교적 일정한 한국인이 접하기엔 꽤 놀랍다. 아이의 신장, 체중, 두위, 흉위, 혈액형 정도가 기록될 한국 출생 기록과는 달리, 피부색의 밝음 정도, 얼굴형, 턱 모양, 눈썹과 길이, 코의 위치와 크기와 길이, 머리카락의 색과 직모 여부 등이 지속적이고 세부적으로 관찰 기록된다. 무엇보다 충격적인 건, 아이가 인종차별이 극심한 1953년 미국에 존재했다는 사실을 각인시킨 기술인데, 어린 사내아기 대니얼에게 ‘검둥이’라는 멸칭이 당연한 듯 달렸다는 점이다.
대니얼은 엄마에게 버림받아 병원에서 보호 중이었다. 아이를 버린 엄마를 탓하기 앞서 그녀에게 임신 중지 수단이 있었으면 어땠을까부터 상상하게 됐다. 물론 1950년대 그녀에겐 그럴 방도가 없었고, 아마도 좋아하던 남자와 한두 번의 관계로 아이를 가지게 되었을 테다. 같이 아이를 만든 남자는 어떤 부담 없이, 어쩌면 임신 사실도 모른 채 떠났을 테고, 이후 불안한 출산과 낳은 아이를 버린 엄마라는 비난과 수치는 여자인 엄마의 몫으로 남았다.
여기까지는 흔한 불운한 출생과 포기 그리고 입양이라는 익숙한 이야기일 수 있다. 그런데 엄마인 캐럴의 상담사인 MW가 집요하게 대니얼의 친부를 캐묻고 이를 증빙하기 위해 주변인을 탐문하면서 이야기는 묘한 긴장감을 자아낸다. 애초부터 태어난 아이에 대해 일말의 관심조차 없이 어서 입양되기를 바란다는 의사를 보인 캐럴은 MW가 대니얼의 생부가 누구인지 반드시 알아야겠다는 의지를 보이자 당황한다.
게다 입양이 지체되며 시간이 흐를수록 대니얼에게서 인디언이나 ‘검둥이’의 인종적 흔적이 드러나기 시작하자 대니얼의 친부가 백인이라고 우긴 캐럴은 궁지에 몰린다. ‘미혼모’는 될 수 있어도 ‘검둥이’의 아이를 낳았다는 불명예를 지고 살 수 없었던 걸까. 유명한 흑인 가수 지미 조던과 교제하지 않았냐는 MW의 추궁에, “지미는 검둥이가 아니에요, 음악가라고요”라고 항변하는 캐럴은 심리적으로 붕괴되어 있다. 흑인을 사랑했으나 밝힐 수도 결혼할 수도 없었던 백인 여성의 곤경이 암울하다.
대니얼의 인종성을 찾아내려는 MW의 노력은 언뜻 아이에게 인종성이 조화로운 가정에 입양 보내려는 노력으로 비친다. 그러나 지체된 시간 탓에 ‘검둥이’ 흔적이 두드러질수록 대니얼의 입양이 힘들어지자 MW의 선의는 심문을 받게 된다. 캐럴에게 대니얼의 친부를 밝히라는 지나친 추궁과 압박이 남기는 섬뜩함은 이후 밝혀지는 그녀의 과거와 비밀스럽게 연결된다.
나치의 정신적 일부였던 인류학을 공부했고 게토에서 유대인을 스케치하던 MW가 미국으로 건너와 그 경력으로 입양 일에 종사하며 태어난 아이의 인종성에 집착하느라 아이의 입양을 지체시키고 한 여성의 삶을 피폐하게 만드는데 몰두했다면, 이를 선의랄 수 있을까. 그녀에게 스며든 우생학이 ‘검둥이’와 놀아나고도 이를 숨기고 아이를 입양 보내려는 백인 여성을, 그것도 자신과 동족인 오스트리아 백인 여성을 단죄하려 추동했던 것은 아닐까.
혼돈, 디아스포라
화자인 프란치스카 등장의 연결점은 그녀의 혼혈 정체성과 그녀가 미국에 오기 위해 떠나온 곳이 오스트리아라는 사실과 유관하다. 오스트리아는 아버지의 나라이자 그녀가 태어난 모국이지만, 명백히 동양인으로 보이는 그녀의 외모는 그녀를 오스트리아인으로도 백인으로도 패싱하지 못하게 했다. 자신이 남들과 다르다는 사실을 인지하는 순간부터 벌어진 혼돈은 한국인인 엄마와의 동일시를 거부하고 엄마를 미워하고 떠나게 했다.
딸에게 거부당한 프란치스카 엄마의 소외와 고독의 깊이는 아득하다. 아내를 “개발도상국 원조 프로젝트”로 대하는 남편과 증오하는 딸, 이들은 그녀의 가족인가? 엄마를 버린 딸에게 상속된 자신과 같은 피부색은 죄책감을 키우고 그녀는 자신을 스스로의 감옥에 유폐시킨다. 백인의 나라에서 백인과 다른 피부색으로 살아가야 하는 모녀가 서로 사랑도 연민도 하지 못한 채 부유하는 모습은 디아스포라의 곤경을 안타깝게 드러낸다.
대니얼과 프란치스카는 백인으로 패싱될 수 없는 인종성으로 고통받지만 이들의 고통이 정말 피부색 때문일까. 백인만이 사람이라는 인종성과 정상성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는 사회가 아니었어도 이들이 고통받았을까. 다름을 추방하려는 사회에서 이들은 나는 누구인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내가 누구여야 이 사회에서 안온히 살아갈 수 있을까 고뇌한다. 살아남기 위해 ‘정상’의 눈밖에 나지 않게 행동하며 ‘명예 백인’이라도 되려 노력한다. 너무 달라도 안되고 너무 같아도 안 되는 아슬아슬한 줄타기 속에 백인성에 식민화된 자신을 발견하는 일은 견디기 힘든 분열일 것이다.
이들처럼 복잡다단한 디아스포라의 삶이 여러 겹 겹쳐졌다. 동양인이라고는 단 한 명도 없는 미국 작은 마을에 ‘전쟁 신부’라는 낙인을 지고 살다 조현병을 얻은 <전쟁 같은 맛>의 ‘군자’, 일제강점기 조선에 들어와 일본인 아버지를 잃고도 한국에서 살아남아야 했던 <대온실 수리보고서>의 ‘문자’, <파친코>의 ‘선자들’ 등, ‘정상’의 주류가 이들의 ‘비정상성’을 조롱하고 비난하고 증오하는 속에서도 자신의 삶을 등애처럼 이고 지고 일구어낸 여성들이 떠오른다. ‘정상’ 인 것만으로는 정의가 아니기에, 그 거대하지만 흩어지는 혐오로는 미력하지만 직면하는 ‘비정상’을 추방할 수 없다.
소설은 프란치스카가 대니얼에게 일말의 진실을 전달할 것을 예견한다. 대니얼 아내의 부탁으로 찾아가 만난 MW의 딸에게서는 선명한 답을 듣지 못하지만, 대니얼의 생부를 추적했던 집요함이 우생학의 노예가 행했던 과거였음을 조금 부끄러워했을지 모른다는 추측을 남긴다. 이 희미한 부끄러움은 누구의 상처도 어루만질 수 있을 만큼 충분하지 않지만, 인생이 본디 그렇지 않던가.
이렇듯 명쾌하지 않은 인생이라는 굴레에 속박되어 있었던 사람이 또 있었으니 다름 아닌 그토록 선명하게 정치적으로 올바른 대니얼의 백인 아내였다. 대니얼의 다름을 부추기며 결국 평생 동안 그를 ‘검둥이’로 여겼던 사람은 타인이 아닌 그녀였다. “왜 당신은 나를, 현재의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거야?” 이제는 장애 노인이 된 대니얼의 빛바랜 호소였다. 우리는 가까운 누군가를 가장 사랑한다면서 사실은 은밀하고 치명적으로 상처내고 있었던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