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젠더를 두려워하랴> (주디스 버틀러, 2025, 문학동네) 서평
8년쯤 전의 일이다. 신앙이 깊은 개신교도 지인과 얘기를 나누다 느닷없이 동성애 혐오가 튀어나와 귀를 의심했다. 요지인즉슨 대학에 진학한 아들이 기숙사에 들어가는데 룸메이트가 제발 동성애자만 아니기를 기도한다는 내용이었다. 기가 막혀서, 동성애자는 이마빡에 성 정체성을 써 붙이고 다니냐고 쏘아붙였다. 성격이나 생활 습관 안 맞는 거는 피하고 싶을 수 있지만, 거기서 왜 동성애 혐오가 나오냐며 언성을 높이게 되었다. 이후 두어 차례 글에 옮기기 곤란한 트랜스 혐오까지 입에 올리는 바람에 절연을 고민했다.
이렇게 한 방 맞기 전까지 지인은 꽤 친한 사이여도 교회 나가라는 강요를 하지 않는 괜찮은 사람이었기에 충격이 꽤 컸다. 대체 이 사람이 왜 이렇게 이상해졌지 하던 내 의구심은 당시 한겨레 신문 기획 보도 ‘가짜뉴스 뿌리를 찾아서’를 읽고서야 풀렸다. 그녀도 이 괴상한 가짜뉴스를 유포하는 그물망에 한 코를 담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때 일이 퍼뜩 떠오는 건 딸애가 전한 해프닝 때문이었다. 딸애의 친구 중 하나가 꽤 신실한 개신교 집안의 아이인데 딸애에게 괴상한 소식을 전하더란다. 내용을 들으니 상식적으로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혐중’ 괴담이었다. 서해 군인들이 중국 군인들에게 살해당하고 있으며, 대거 유입된 중국 공안이 경찰과 손잡고 한국 사회를 흔들어 북한의 남침을 꾀한다는 내용이었다. 딸애도 나도 피식 웃음이 나온 이 터무니없는 조작 뉴스에, 딸애의 친구가 이걸 진실이라 여기며 각성을 촉구했다는 게 충격이었다.
웃고 말 일인가 잠시 생각하다, 배타적 민족주의, 반이민주의, 반젠더(반페미니즘) 등의 기치 아래 전 지구적으로 준동하고 있는 파시즘의 기운이 우리 사회에도 이런 괴담의 형식으로 유통되며 어떤 사람들의 불안을 땔감으로 가상의 적을 만들어내 무턱대고 믿고 증오하게 만들어 만인의 투쟁으로 유도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자 퍼뜩 등골이 오싹해졌다.
앞서 조작된 정보의 전달자로 개신교도인 지인과 딸애의 친구를 언급한 것에 불쾌함을 느낄 개신교도들도 있겠지만, 이제는 이런 감정 다툼을 할 한가한 단계는 넘어선 듯하다. 조작 정보의 유통자로 지목된 개신교 종파가 일부일 뿐이라고 투덜대기엔 그 세력이 한국 사회를 어지럽히는 강력한 극우 세력이 되어있으니 말이다. 불평에 앞서 이제는 책임감을 느껴야 할 시간이지 않을까.
앞서 소개한 개신교도 지인의 동성애 혐오가 페미니즘은 물론이고 트랜스 혐오로 확장되어 실체가 없는 공공연한 불안을 준동하며 사회를 공포로 몰아넣고 있다는 사실을 명확히 인지한 건, 젠더 연구의 대가 주디스 버틀러의 책 <누가 젠더를 두려워하랴>을 읽고서였다. 그는 작년 12월 강연 차 한국에 왔는데 하필 계엄 전날이었다.
유감스럽게 나는 그의 방한 소식조차 몰랐고 돌아간 후에야 기사를 통해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의 강연이 마치 작전이라고 치르듯 진행된 사정에 개신교도들의 빗발치는 항의가 있었다는 것도 나중에야 들었다. 이 사태가 있기 전 2021년 EBS 시리즈 <위대한 수업, 그레이트 마인즈>에서 주디스 버틀러가 젠더 수업 편을 다루었을 때에도 개신교도의 엄청난 반발이 있었던 것은 물론이다.
한국 사회 극우의 큰 축을 개신교도들이 장악하고 있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들은 내 지인처럼 무턱대고 동성애를 혐오하는 것은 물론이고, 트랜스젠더를 죄악시하고, 아이들의 성교육이 조기 성관계나 동성애를 조장한다고 의심하고, 낙태를 살인이라 단죄하고 이를 부추기는 페미니즘을 일소해야 할 사회악으로 규정하는데 한목소리로 성토해왔다.
나는 이들의 망상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지만, 그 근간에 기독교의 여성혐오관이 자리하고 있음을 안다. 아담(남성)의 갈비뼈로 만들어진 천성이 음탕한 이브(여성) 따위가 어디서 감히 나대느냐, 성별은 신의 뜻으로 여남으로 정해졌거늘 감히 성별을 정정하겠다는 것이냐, 신이 정한 이성애의 근간을 동성애가 흔들려는 것이냐, 남성(백인)의 얼굴을 하고 있는 신을 보아라, 어디서 여성 따위나 열등한 인종이 신의 권위에 도전하느냐, 하는 가부장의, 백인우월주의의, 식민주의의 자기애적 종교관 말이다. 그리고 이들이 이렇게 철석같이 믿고 있는 진리, 규범. 법을 젠더가 흔든다고 믿고 주조해낸 것이 ‘젠더 이데올로기’이고, 이 반 젠더 진영의 선두에 기독교가 있다.
한국 사회를 반추해 기독교 중심으로 반젠더 집단을 언급했지만, 주디스 버틀러는 이보다 확장된 ‘초교파적 동맹’을 지목한다. 기독교뿐 아니라 가톨릭, 러시아정교회, 미복음주의교, 동아시아와 동아프리카의 기독교 조직들, 유대교, 에르도안식 이슬람교 가족 정치, 힌두 민족주의까지 아우르는 거대한 동맹은 이성애를 근간으로 한 ‘자연적 가족’이 유지되어야 강력한 가부장의 통제와 이를 통해 수행되는 종교의 권능이 유지되기에 이를 방해한다고 믿어지는 젠더를 척결해야 할 공동의 적으로 상정했다고 주장한다.
대체 젠더가 무엇을 꾀하길래 이처럼 초교파적 초국가적 동맹을 만들어냈을까. 주디스 버틀러는 젠더를 연구한 저서 <젠더트러블>을 통해 성별화된 신체의 수행성을 짚어냈다. 그의 이론은 ‘젠더 이데올로기’가 오도하는 것처럼, 우리 모두가 동성애자(트랜스)가 되어야 한다는 것도 성별을 부정한 것도 아니다. 다만 어떤 성별인지를 결정하는 전능하고 유일한 기준이 특정한 생물학적 성별 규정 권한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태어나면서 지정된 성별과 충돌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 어려움이나 혼란 또는 좌절 등을 겪지 않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의 경우 평생을 불안정한 상태로 살아가야 한다. 이들의 취약함은 높은 유병률이나 자살률만 보아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특정한 성별을 이유로 임신 출산 등의 재생산을 강요하거나, 실업으로 내몰거나, 직장 내 괴롭힘과 차별을 가할 이유가 돼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오히려 “의술, 학문, 경제학, 공사적 영역의 설정, 노동 조직(분업), 국가 조직, 빈곤 문제, 구조적 불평등, 전쟁과 폭력의 양상 등을 이해하는 우리의 사고방식을 단순한 생물학적 문제로 왜곡시켜 체제의 부당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사회를 불안하게 만드는 기제로 젠더를 악마화하고 있다고 일갈한다.
한국 사회의 경우 젠더는 페미니즘과 거의 동의어로 받아들여지면서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다. 여성살해가 도처에서 벌어지고, ‘N번방’ 이후에도 디지털 성폭력은 줄어들 기세가 없으며, 페미니즘 검열로 여성 노동자들이 부당하게 해고당하고, ‘된장녀’ ‘맘충’ 등 여성혐오가 청소년들의 일상어가 되었다.
이를 이용해 화력을 키우던 정치인은 권력도 예산도 없는 여성가족부를 없애겠다고 을러대다 마침내 ‘송곳 발언’으로 대국민 성폭력을 저질렀다. 이런 참담한 상황이지만, 여성(젠더, 페미니즘)들이 여전히 사회 공공연한 적폐로 여겨지는 부정의한 현실이 확장 일로에 있다.
지금의 한국 사회를 결혼한 이성애 장년 여성이라는 위치에서 단순히 조망해 보면, 크고 작은 내 모든 고민에 젠더는 공기처럼 스며있지만, 그렇다고 젠더를 내 삶의 가장 큰 불안과 공포로 지목할 수는 없다. 나를 크게 불안하게 하는 것은, 집 근처 오두산 통일전망대에서 바라보면 금방이라고 한걸음에 닿을 수 있을 듯 보이는 북한과의 긴장 상태다. 요즘처럼 전쟁이 전 지구적으로 ‘뉴노멀’이 되어가는(아직도 우크라이나나 가자 지구 전쟁이 남의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에 놀랄 뿐이다) 상황에선 더욱 불안하다. 그리고 코앞에 닥친 취약한 노년 또한 나의 불안과 공포의 우선 순위다.
물론 저마다 각자의 위치와 사정이 다르겠지만, 반젠더의 광기가 추동하는 대로 젠더(페미니즘)가 우리 삶을 불안하게 하는 가장 큰 문제인지 숙고할 일이다. 우리 삶을 위기에 처하게 하는 분단체제, 계엄을 일삼는 권위주의 정치, 양극화된 경제 불평등, 늘어나는 실업률 자살률 산업재해율, 지방 소멸 위기, 불안정한 보건 의료, 재앙으로 다가오는 기후 위기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많은 문제 중 무엇을 젠더가 야기했는가. 나날이 우리의 숨통을 조여오는 자본주의 능력주의 권위주의의 적에 젠더를 지목하고 준동하는 것은 해도 해도 너무 나간 경거망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