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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많은 여성이 여자라는 이유로 죽고 잊혀졌을까

<양양> (양주연 감독, 2025) 리뷰

by 그냥

가장 꺼내기 힘든 이야기는 단연 자신, 그리고 자신과 깊게 연관된 가족에 관한 이야기일 것이다. 상처가 깊게 난 이야기는 수치를 동반하기에 발화되기 어렵고, 그래서 죽음과 함께 영원히 봉인되기도 한다. 진실은 드러나기 어려운 사건, 맥락, 이야기다.


나도 아직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못한 이야기가 있다. 얼마 전 읽은 <작은 일기>에서 작가 황정은이 ‘아직’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상처 깊은 사건이 있다고 했을 때, 위로받았다. 침묵해야만 하는 ‘사건’, 어떨 땐 미치도록 토설하고 싶지만 결국 말하지 못하는 고통이 나만의 것은 아니라는 동질감 때문이었나 보다.


양주연 감독의 영화 <양양>은 바로 이 침묵에 관한 이야기다. 그녀는 어느 날 아버지로부터 죽은 고모의 존재를 듣고 어떤 ‘사건’이 있었음을 감지한다. 게다 고모가 요절했다는 사실을 확인하면서, 영화는 고모의 죽음을 대하는 가족과 사회의 태도를 직시하게 한다. 젊어 죽은 것이 그녀의 잘못은 아닐 텐데, 왜 그녀의 죽음은 그토록 오랜 세월 말해서는 안 될 상스러운 것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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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각된 고모를 술에 취해 처음 발설한 아버지는 “너는 고모처럼 되지 마라”고 했다. 감독이 이 말의 진의를 캐묻자, 그는 고모가 요절함으로써 부모 가슴에 대못을 박았으므로 이것이 나쁘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나는 경악했다. 문득 어떤 외국인이 한국인들에게서 가장 이해하기 힘든 감정이 ‘효’라는 정서였다며, 오랜 고민 끝에 한국인에게 ‘효’가 기독교의 원죄와 같은 관념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는 일화가 기억났다. 그때 나는 동의하지 않았는데, 영화 속 아버지의 궤변을 듣자니 공감되었다.


고모는 아버지의 누나였다. 아버지가 고2 때 고모가 사망했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너무 어려 누나의 죽음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달 수는 없을 나이다. 그런데 사망에 이르게 된 경위를 전혀 모른다고 했다. 이는 나중에 모른 것이 아니라 일종의 자기 부정이었음이 드러난다.

아버지의 미진한 진술을 극복하기 위해 감독은 고모의 흔적을 좇는다. 고모의 학교 친구들이나 대학 시절 지인들을 만나 인터뷰하면서 그들의 기억 속 고모를 조금씩 알아낸다. 고모의 유품을 찾아내 그녀가 읽었던 책이나 메모 시 그리고 사진들을 본다. 가족과 찍은 다소 엄숙한 아이의 모습, 교복을 입고 찍은 단발머리 소녀의 모습, 대학에 입학한 후 찍은 성인 여성의 모습 등은 죽은 이유를 설명하지 못하지만, 약 20년이 넘도록 살아낸 한 여성의 삶의 흔적을 증언하고 있었다. 그렇게 생생히 살아있던 그녀는 왜 죽었고, 왜 침묵 속에 갇혀 있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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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모를 찾아서’라는 부제를 달아도 어색하지 않을 영화는 묘하게도 영화를 찍는 감독 자신과 가족과의 관계 속으로 자주 틈입한다. 이는 고모의 죽음을 추적하며 번번이 직면하게 되는 가부장의 그림자가 자신의 삶에도 여지없이 드리워져 있다는 자각 때문이었을 것이다.


고모의 성장기였던 60-70년대는 ‘딸은 집안 밑천’이라는 말을 부끄러움 없이 통용했을 정도로, 딸은 가정을 위해 당연히 헌신하고 희생해야 하는 존재였다. 그러니 영특해 학업 성취가 뛰어나도 서울로 진학하려던 딸의 꿈을 가부장이 부러뜨려도 별스럽지 않았다. 이렇듯 마음껏 재주도 재능도 펼칠 수 없던 과거의 고모로부터 카메라를 들고 고모를 추적하는 조카인 감독은 그때의 차별로부터 얼마나 멀리 달아나 있을까. 밖에서는 당당한 여성이지만, 집에서는 언제나 아들인 동생의 뒷자리에 있던 자신을 밀어낼 수 없었다.


고모의 추적이 답보상태일 때 감독은 고모의 죽음에 뭔가 있었다는 제보를 받는다. 고모의 친구가 전하 바는, 고모에게 사귀던 남자가 있었고, 그의 강압적 태도 때문에 자주 다투었으며, 고모의 마지막이 그의 집이었다는 놀라운 증언이었다. 남자의 집에서 죽다니, 충격이었다. 이상해도 보통 이상한 사건이 아니라 경찰 수사를 했어야 마땅할 텐데, 왜 가족들은 돌연사라는 결론으로 침묵을 택했을까.


친밀한 관계에 의한 ‘여성 살해’는 이 사건처럼 가족에 의해 ‘이유 없음’으로 조작되거나, 사라진 몸을 영원히 찾을 수 없는 암수 살인이 된다. 실종된 수많은 여성들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어딘가에 원통하게 묻혀 있는 것이다. 지극히 개인적 비운으로 보이는 사건들 말고도 역사적 여성 집단살해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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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목소리들>은 제주 ‘4.3’을 겪으며 수많은 여자들이 강간당하고 살해되었으나, 이들의 존재가 70년이 넘도록 침묵 속에 감금당한 부정의를 파헤친다. 생존자들의 피를 토하는듯한, 통곡을 조금씩 끊어 내뱉는 듯한 깊은 한숨 소리는 침묵하지만 침묵할 수 없는 절규다. 개인적이건 집단적이건, 여성인 이유로 살해된 가해의 진상은 이어지는 무참한 죽음을 막기 위해서라도 철저히 규명되어야 한다.


감독의 아버지는 심화되는 인터뷰에서 ‘그 남자’의 존재와 그의 집에서 누나가 죽은 것을 알고 있었고, 심지어 누나가 죽던 날 병원에서 ‘그 남자’를 목격하기까지 했다고 말한다. 그런데 왜 누나의 죽음에 대해 잘 모른다고 봉합하려 했을까. “고모처럼 되지 말라”는 앞선 한탄에서 그는 누나의 죽음에 대한 의문이나 비통함을 누락한 채 누나의 불효만을 탓했을 뿐, ‘그 남자’가 누나 죽음의 가해자일 가능성은 깨끗이 배제했다.


왜 아버지와 가족들은 고모가 죽은 장소가 ‘그 남자’의 집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녀 죽음의 순결마저 훼손당했다고 여기고 가문의 수치로 받아들였을까. 죽음의 순결이 훼손되었기에, 그녀는 죽어서도 내쳐지고 버려지고 잊혀졌다. 단 한 번도 애도되지 못한 채, 누군가의 ‘살인의 추억’으로 남은 것이다.

감독 역시 고모의 죽음에 그 남자가 연루되었고, 이는 지금의 ‘교제 폭력(살인)’으로 추정될 근거가 다분해 보이지만 거기서 멈춘다. 그녀는 그 이유를 한 인터뷰에서 “고모의 마지막이 궁금했지만, 사건에 대한 조사조차 이뤄지지 않았는데 고모의 마지막을 그 남자의 입을 통해 규정할 수는 없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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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은 고모가 비운에 간 이유를 “그 남자의 입을 통해 규정”하지 않으면서 한 보 더 진전시킬 수는 없었을까. 아쉽다. 감독은 아버지가 고모의 죽음을 직면하게 돕고, 가족묘를 이장할 때 비석에 누락된 고모의 이름을 새겨 넣을 것을 제안하고 실행한다. 이로써 아버지는 누나의 죽음을 ‘이유 없음’으로 유기하고 ‘애도 없음’으로 침묵에 가둔 참혹한 가족사와 가부장 폭력사를 뼈아프게 성찰할 수 있을까.


‘양양’을 보며 나도 비운에 간 언니를 생각했다. 나는 언니 죽음의 원인 규명을 두고 가족은 대립했지만 실패했다. 나는 지금도 그 사건을 글로 옮길 수 없다. 그래서 감독의 카메라가 고모의 죽음과 ‘그 남자’의 연루와 그리고 그녀의 죽음이 침묵에 이르게 된 모든 공모의 경위를 끝까지 따라가기를 바랐던 것 같다. 감독은 탐정이 아니라고 할 것이기에 탓할 수는 없다. 그러나 피사체에 대한 태도가 탐정 이상이었어야 했다는 것은 양보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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