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집에서 죽을 수 없는 노인들의 곤경

<어느 서민 여성의 삶, 노년, 죽음> (디디에 에리봉, 2025) 서평

by 그냥


엄마가 많이 쇠약해져 기력이 완전히 떨어졌을 때, 잠깐 요양원을 생각한 적이 있었다. 돌봄에 조바심 나던 어느 하루, 엄마는 요양원 얘기는 꺼내지도 않았는데, 나를 거기에 버릴 거냐고 물어왔다. 갑작스러운 엄마의 말에 깜짝 놀라 성을 내다 왈칵 눈물을 쏟아냈다. 속을 들킨 부끄러움과 죄책감 그리고 이제 자신을 버려질 처지로 인식하는 엄마에 대한 연민 등,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에 휩싸였었다. 지금도 너무나 생생한 아픈 상처다.

다행히 엄마는 돌아가실 때까지 죽도록 두려운 그곳에 버려지지 않았다. 부모를 그곳에 둔 주변의 몇몇 지인들의 애달픔을 보노라면, 어쩌면 엄마보다 나에게 더 큰 다행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랭스로 되돌아가다>를 쓴 디디에 에리봉도 자력으로 보살필 수 없는 어머니를 요양원에 맡기게 되면서 겪은 경험과 성찰을 <어느 서민 여성의 삶, 노년, 죽음>에 담았다.

디디에의 어머니는 수차례 혼절해 쓰러진다. 위급한 상황을 여러 번 겪으며 더는 어머니를 혼자 둘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자 아들들은 서둘러 어머니를 요양원에 입소시킨다. ‘사회적 입원’이 강행된 것이다. 어머니의 저항이 있었지만, 취약한 노인의 주장은 고집으로 무시된다. 자신의 집에서 살 권리를 늙고 쇠약하다는 이유로 박탈당한다면 어떤 감정에 놓이게 될까. “우리는 자신의 친숙한 세계, 환경, 일상성으로부터 뿌리 뽑힌 스스로를 발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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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 상상해 보자. 익숙한 삶의 공간인 집에서 강제로 뽑혀져 낯설고 비좁은 방으로 이식된 채 닥치고 살아가라는 엄명을 받은 사람의 감정을. 낯선 환경과 사람들 틈에서 내 마음대로 통제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게 된다면, 그야말로 ‘멘붕’ 아닐까. 디디에는 이 미칠 것 같으면서도 어쩔 수 없는 극단적 상황을 ‘뿌리 뽑힘의 충격’이라고 했다.


디디에의 어머니는 요양원에 든 초기, 어떻게든 적응해 보려 했던 것 같다. 낯선 사람들과 함께 식사하고 어울려도 보려고 했던 것 같다. 생각해 보면, 사교란 얼마나 많은 에너지를 요구하는가. 낯선 이의 표정을 살피고 어긋나지 않게 대화를 이어가려면 상당한 힘을 내고 써야 한다. 보통 사람들에게도 고된 일이다. 쇠약해진 노인에게는 어땠을까. 점차 어머니의 불평이 늘어나기 시작했는데, 후에 디디에는 그녀의 불평이 요양원의 전형적인 학대 사례임을 깨닫는다.

디디에는 그의 어머니가 겪은 피해가 체계적 학대임을 밝히기 위해 프랑스 시민단체 ‘권리수호자’가 조사한 에파드에 수용된 노인들의 기본권 침해 보고서를 소개한다. 어머니가 불평한 “적어도 하루에 한 번 일어나지 못하는 것, 일주일에 한 번 이상 샤워하지 못하는 것, 침대에 누운 사람을 하루에도 몇 번씩 일으켜서 화장실에 데려가고 용변을 보도록 도울 수 없다는 이유로 계속 기저귀를 채워놓고 있는 것” 등의 침해가 어머니만이 당한 피해가 아니라고 보고서는 밝힌다. 한국 요양원의 현실도 흡사하다는 점에서, 전 지구적 현상이 된 돌봄의 척박함에 마음이 무거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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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디디에의 어머니는 자신의 공간과 분리된 ‘뿌리 뽑힘의 충격’으로 ‘슬라이딩 증후군’(“근본적이고 비가역적 변화 이후 오래지 않아 타계”)을 겪고 죽음에 이른다. 요양원에 든 지 3, 4주도 채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버림받은 아이로, 14세에 이미 하녀였고, 이후 가정부, 공장 노동자로 살다, 스무 살에 사랑하지도 않는 남자와 결혼해 55년을 살았다. 여든 넘어 겨우 자유를 얻는가 했더니 이도 잠깐, 결국 자기통제권을 잃은 채 요양원에서 죽음을 맞은 것이다.


요양원 입소 후 너무나 빨리 떠난 어머니의 죽음은 디디에에게 깊은 상처를 입힌다. 남은 자의 고통인 죄책감을 부여잡고 어머니를 회고하고 애도한다. 그는 책과 지식인의 사유를 경유하는 방식으로 어머니를 돌이킨다. 이는 지식인이라는 그의 정체성에 걸맞은 지적인 애도임에 틀림없지만, 아들의 방식인 것도 분명하다.

나는 엄마를 잃은 후 애도의 공백으로 한동안 침잠해 있었다. 엄마를 더 오래 기리고 더 많이 슬퍼하고 싶었지만, 죽음과 삶의 경계를 엄격히 짓는 풍속은 어서 잊고 생활로 돌아가라고 재촉했다. 미진한 애도는 엄마를 잃은 사람들의 책에 매달리게 했다. 아니 에르노의 <나는 나의 밤을 떠나지 않았다>, 린 털먼의 <어머니를 돌보다>, 비류잉의 <단식 존엄사>, 박정애의 <굿바이, 영자씨> 등. 모두 여성 작가의 애도이자 돌봄의 글로 깊은 위로를 주었다.


위 여성 작가들의 기록은 엄마를 타자화하지 않는다. 아마도 그들 자신 여자이자 엄마라는 동류적 위치성이 대상화를 상당히 막아냈을 테고, 무엇보다 누군가를 보살피는 돌봄자라는 당사자성이 엄마를 늙은 ‘서민 여성’으로 계급화하는 것에 거리감을 두었을 것이다. 지적인 애도의 기록인 디디에의 글엔 결정적으로 이것이 빠져있다. 이는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아들이자 남자인 그는 누군가를 돌볼 의무에서 상당히 면책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대상이 비록 어머니일지라도 말이다.


그는 유년기부터 엄마에 대한 집착이나 사랑이 크지 않았고, 크면서는 어머니와 대화가 통하지 않았고, 성인이 되어서는 아예 고향과 가족을 멀리했기에, 어릴 적 파편화된 기억과 먼 친척으로부터 얻은 정보를 통해 어머니라는 존재를 겨우 구성해낼 수 있었지만 역부족이었다. 그는 어머니를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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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 노블 <부러진 날개>에서 저자는 어머니의 쇠약으로 약간의 돌봄을 시작하면서 어머니가 한쪽 팔을 쓰지 못한다는 사실을 비로소 알게 된다. 누구도 양육자의 돌봄 없이 존재할 수 없지만 이는 자연화되었기에, 보살핌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돌봄자의 문제나 사정엔 무지해도 된다고 여겨진다. 늘 돌봄을 제공하던 존재가 더 이상 이를 행할 수 없을 때가 되어서야 겨우 그를 조금 들여다보게 된다.


디디에 역시 어머니를 몰랐고 늦었다. 어머니를 관계적으로 정체할 수 없는 그의 애도는 그녀를 노동자라는 계급성으로 구성한다. 노동자였던 ‘서민 여성’으로 어머니를 정체하는 것이 비윤리적이라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 계급성 외 소환해낼 것이 빈곤한 결핍이 어쩔 수 없이 드러나고 만다는 것이다. 그 자신 부모이지 않기에, 가족적 돌봄이라는 이슈가 무가치했을까. 그렇다면 이는 오해이지 않을까.

누구나 늙고 취약해지고 의존하게 된다. 디디에 역시 이미 일흔이 넘은 나이로 누군가의 돌봄이 멀지 않았다. 그래서 그의 주장 “그들의 목소리를 들리게 하는 것”, “목소리를 주는 것”으로 ‘늙은이들’의 생각, 요구, 권리 등을 외부의 판단이 아닌 그들의 담론으로 구성해야 한다는 주장은 타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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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에 앞서 디디에를 포함한 시민 일반이 더 절실히 매진해야 하는 것은 모두 돌봄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젠더 편향적이거나 사적인 돌봄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 생애 전반에 걸쳐 누구나 돌봄을 주고받을 수 있어야 한다. 자기 돌봄은 물론이다.


돌봄이 나의 일이 아니고 돌봄에 무지한 채, 취약한 누군가의 목소리를 들은들, 공감하고 이해할 수 있을까. 청자가 들을 준비가 되어 있을 때에야 비로소 화자의 말이 살아난다. 노년에 대한 철학에 앞서 돌봄이 더 시급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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